[아침햇발] 외환위기라뇨? 태평합니다!

정남구 2022. 9. 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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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28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화면에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장 중 1440원을 돌파한 원·달러 환율은 18.4원 오른 1439.9원에 마감됐다. 연합뉴스

정남구 | 논설위원

1997년 가을은 을씨년스러웠다. 연초 840원대이던 환율이 8월26일 900원대로 올라서더니 11월19일엔 1000원을 넘어섰다. 외국인들이 투자금을 챙겨 나가는데, 바꿔줄 달러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길한 대책들을 쉬쉬하며 입에 올렸다. 그 무렵 정부과천청사에서 재정경제원 고위 당국자를 만났는데, 거의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피곤에 전 얼굴로 한숨만 푹푹 내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환율은 12월 말 1964.8원까지 올라갔다.

또 한번 외환위기가 오는 거야? 25년이 지나, 요즘 많이 듣는 말이다. 연초 1200원을 밑돌던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돌파하고도 계속 오르고 있으니 그런 질문을 할 만도 하다. 알량한 지식이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할 도리밖에 없다. 1997년 말엔 우리 경제 운용이 심각한 약점을 드러내, 결국 금융·투기 자본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리는 과정에서 달러가 초강세다. 다른 주요국 통화처럼 원화 가치도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몸이 아파서 열이 난다기보다는 뜨거운 태양 아래 있어 몸이 더운 것이다.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는 외채가 많은 국가였지만, 지금은 순대외금융자산이 7441억달러(6월 말 기준)에 이르는 나라다. 달러 유동성이 문제가 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런저런 장부에 기록된 수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라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다. 책임감과 능력 두 측면에서 신뢰가 무너지면 외환보유고가 얼마나 많은지는 별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최근 영국 정부의 경기부양책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평가와 반응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2분기 성장률이 -0.1%로 떨어진 영국 정부는 지난 23일(현지시각) 이른바 ‘미니 예산안’을 발표했다. 법인세 인상 계획을 철회하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내리는 등 2027년까지 450억파운드(약 70조원)를 감세한다는 내용이다. 또 앞으로 6개월간 600억파운드(약 94조원)를 들여 에너지 요금을 지원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달러 강세에 따라 떨어지고 있던 영국 파운드의 가치는 22일 파운드당 1.1257달러에서 26일 장중 최저가 1.0384달러까지 추락했다. 이후 1.08달러대로 반등했지만, 부정적인 전망이 팽배하다. 1파운드가 1달러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발단은 당면 국내 정치적 목적의 ‘미니 예산안’이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 데 있다. 영국 정부의 정책 판단 능력에 대한 불신도 확산됐다. 파운드의 동향에서 눈을 떼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 경제팀의 경우, 지극히 태평한 것이 걱정이다. 우리 경제엔 가계부채라는 엄청난 취약점이 있다. 외부 여건이 나쁠 때는 더 조심하고,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사태에 대해 치밀한 대응책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눈앞의 정치적 득실을 계산해, 선거에서 이기게 해준 지지층 챙기기에만 전념하는 모양새다. 대기업을 위한 법인세 감세, 부동산 부자에 대한 보유세 감세가 대표적이다. 규제 완화도 재계의 민원 챙기기에 쏠려 있다. 나머지 에너지는 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 쏟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7월5일 비상경제민생회의를 매주 열겠다고 밝혔다. 사흘 뒤 첫 회의를 주재했는데, 8월31일 7차 회의를 연 뒤로는 한달 만인 9월28일에야 8차 회의를 열었다. ‘디지털산업 혁신 정책’이 주제였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28일, 채권시장에 5조원을 투입하고 증권시장 안정 펀드 재가동도 준비하겠다고 밝혔는데, 해열제 한 방에 불과하다는 걸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외환위기에 무거운 책임이 있는 당시 경제관료가 다들 부활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당시 차관이던 강만수씨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747 공약’(7%대 성장, 10년 내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 진입)을 설계해 선거를 도운 뒤, 이명박 정부의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이 되었다. 강만수씨 밑에서 금융정책실장을 하던 윤증현씨는 노무현 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을 맡더니,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맡았다. 힘없는 이들만 죽어났다. ‘영혼 없는 관료’들에게만 맡겨둬선 안 된다. 대통령이 강한 책임감을 갖고 경제를 직접 챙겨야 할 때다. 하루하루 불안이 커지고 있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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