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엔 마음이 담겨 있어요".. 82세 할머니의 글씨, 폰트로 제작된다

윤상진 기자 2022. 9. 2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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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교보손글씨대회' 최고상
역대 최고령 82세 김혜남 할머니
1만점 중 뽑혀 디지털 폰트 제작
‘제8회 교보손글씨대회’에서 최우수상인 ‘으뜸상’을 수상한 김혜남(82) 할머니. 김 할머니는 “글씨에는 그 사람의 성품이 담겨 있다”고 했다. /윤상진 기자

“글씨는 사람의 마음인 것 같아. 사람의 마음이 거기 담기는 것 같아요.”

82세 ‘할머니 서화가(書畵家)’의 글자가 교보문고가 뽑은 ‘올해의 글씨’가 됐다. 8회째를 맞는 ‘교보 손글씨 대회’는 참가자들이 각자 감명 깊게 읽은 책 속의 문장을 손글씨로 옮겨 내면, 심사위원 평가와 대중 투표를 통해 아름다운 필체를 선정하는 행사. 예쁘고 서정적인 글씨를 써내는 대회인 만큼 출판계 종사자 등 ‘글밥’을 먹는 사람들이나 2030 젊은층이 주로 참여해왔다. 하지만 올해는 최우수상인 ‘으뜸상’ 작품 10종 중에서도 김혜남 할머니의 글씨가 빛났다. 역대 최고령 수상자인 김씨의 글자는 1만 개에 달하는 참가작 중 유일하게 디지털 폰트로 제작된다. 심사위원인 유지원 타이포그래퍼는 “곡선에 싱싱한 탄력이 있고, 간결하게 새침하다”고 평했다. 글씨의 주인을 26일 자택에서 만났다.

김혜남 할머니의 글씨. 마음산책 출판사의 책 '음식과 문장' 속 구절을 손글씨로 옮겼다. /교보문고

59학번인 김씨는 대학에서 영문학 학위를 딴 뒤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했다. 이후 30년 이상을 대한적십자사에서 일하며 주로 국제 원조 업무와 국제회의를 주관하는 업무를 맡았다. 당대 여성으로선 흔하지 않은 커리어다. 그래서 손글씨보다 오히려 타자기와 키보드가 익숙했다. 워드 프로그램을 쓰면서도 기본 서체 외엔 써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글자의 심미성(審美性)엔 큰 관심이 없었다. “가족 중에선 저보다 기자였던 아버지가 글씨를 잘 쓰셨죠. 오빠도 잘 쓰는 편이었고요. 전에도 글씨를 못 쓴 것은 아니지만, 퇴직 이후 글씨 연습을 하면서부터 글이 지금처럼 얌전하고 크기도 더 고르게 됐죠.”

그가 글씨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00년 퇴직 이후 집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다. “그냥 읽으면 집중이 잘 안 돼서 따라 쓰기 시작했어요. 쓰기에만 집중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전엔 못 봤던 내용들이 보이더라고요.” 글씨를 막 쓰기 시작했을 땐 기분이 안 좋으면 글씨도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이제는 글 쓰는 행위를 통해 평온을 찾는다. 그는 건축가인 아들이 추천해준 미쓰비시의 ‘유니볼’ 펜으로만 20년 동안 매일 꼬박 세 시간을 썼다고 했다. 평소 좋아하는 드보르자크와 바흐의 선율도 글씨를 쓰는 시간엔 멈춘다. 그렇게 지금까지 모인 것만 수백쪽 분량 공책 13권이다.

재야(在野)의 글씨 고수에게 전국대회 상을 안긴 것은 가족들의 전폭적인 응원이었다. “어느 날 주문한 책 사이에 끼워져 있는 손글씨 대회 안내문을 봤어요. 하지만 ‘나 같은 할머니가 어떻게’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여졌죠. 그런데 기자 출신 며느리가 제 필체와 책의 내용이 어울린다며 ‘음식과 문장’(마음산책)을 골라줬어요. 본선에 진출하니까 딸은 온 식구들을 동원해 투표를 하게 했죠. 그래봤자 열명이 조금 넘지만(웃음).”

부상으로 받는 상품권 50만원 모두 자신이 애용하는 펜과 공책을 사는 데 쓰겠다는 그. 손으로 글씨를 눌러담는 행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쓰세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꼭 손글씨 쓰세요. 같은 곳에 살더라도, 전화를 할 수 있어도. 글은 내 감정에 가장 솔직해지는 수단이에요. 어떻게 써야 상대방이 좋아할까. 자신이 할 수 있는 말 중 제일 좋은 말을 떠올려서 그걸 쓰잖아요. 젊은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글쓰기는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담는 연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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