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짐짝이 남에겐 보물"..절판본도 구해주는 책탐정 [인터뷰]

김유태 2022. 9. 2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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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기담 수집가' 저자 윤성근
왜 찾는지 사연 들려주면
절판본도 구해주는 '책 탐정'
출판사 편집자·번역자보다
영업직이 더 많이 갖고 있어
"한 사람에게 소중한 책이
타인의 짐짝 되는 게 참담"
국내서 6쇄 인쇄되며 인기
中·日·태국에 판권 팔려
서울 은평구에서 15년간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한 윤성근 대표. [이충우 기자]
녹번에서 서오릉 방향으로 가는 길에는 숨겨진 헌책방이 하나 있다. 2층 간판은 이렇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여기 주인장 직업은 '헌책방 사장'만은 아니다. 절판된 책을 찾아주는 '책 탐정'이 그의 본업에 가깝다. 첫사랑이 추천했던 그 시절 그 책, 요양병원에 들고 갈 바로 그 책. 온라인 클릭 몇 번으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절판본을 구해다 주는 수고비는 '쩐(錢)'이 아니다. 왜 그 책을 찾는지, 의뢰인 사연을 들려주기. 이게 수수료다.

윤성근 대표는 지금까지 헌책 1000권에 얽힌 사연을 수집했고, 29편을 엄선해 에세이 '헌책방 기담 수집가'(프시케의숲 펴냄)를 냈다. 스코어는 6쇄. 중국·일본에 이어 최근 태국에도 판권이 팔렸다. 심지어 영화화도 논의 중이다. 묵은 향이 시간을 정지시킨 명저의 안식처에서 28일 윤 대표를 만났다.

"거의 탐정 수준이죠. (웃음) 다른 헌책방 연락해보고, 출판사에 전화 걸고, 출간 당시 직원까지 수소문해요. 여기서 퀴즈. 출판사 직원들 중에 시간이 지나도 누가 책을 끝까지 갖고 있을까요? 편집자? 번역자? 아니에요. 영업사원이에요. 발로 뛰며 책 팔아본 영업직은 끝까지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웃음)"

의뢰인 이야기는 사연의 박물관이다. 윤 대표는 특히 K씨를 자주 회고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소설 '앙데스마 씨의 오후'가 실린 신구문화사판 '현대세계문학전집2'를 애타게 찾던 노신사였다. 책에서 앙데스마 씨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18세 딸 발레리를 키운다.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K씨는 고교 시절 읽은 저 책을 다시 읽고 싶어했다.

출간연도는 무려 1968년. 윤 대표는 결국 책을 찾아 K씨에게 건넸다. 머지않아 K씨의 부고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 재산에 관심 있고 헌책에 무관심한 유족 탓에 '앙데스마 씨의 오후'는 윤 대표에게 되돌아왔다. "한 사람이 생의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책이, 그의 자식에게 짐짝처럼 취급되는 건 참담한 일이죠. 아직 제 헌책방에 그대로 있습니다."

단골 M씨와의 '책 대결'은 한 편의 활극이다. 1979년 출간된 장 주네의 '도둑 일기'를 찾는 B손님이 있었다. 윤 대표는, 책을 사지는 않으면서 몇 시간째 책방을 둘러보던 M씨와 '도둑 일기' 먼저 찾기 내기를 하게 된다. B손님이 내건 상금은 50만원. 너무 흥미로워서 여기서부터는 직접 책을 읽는 게 낫겠다.

"자신의 모든 감성을 책에만 쏟아부은 분들, 책 때문에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인 분들을 만나기도 해요. 그러나 책은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책 스스로 나타나줘야 해요. 흔한 책도 찾으려 하면 없는 경우가 많고 안 찾아지다가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기도 하고요. 모든 책은 어떤 사람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사실 윤 대표 전공은 컴퓨터공학이다. 잘나가던 정보기술(IT) 회사를 그만둔 건 2002년이었다. 그해 6월, 한일월드컵 열기 속에 종로서적 폐업 소식을 들으면서 '뭔가 이제 내가 정말 하고픈 일을 하겠다'는 열망을 계시처럼 품었다. 출판사에서 2년, 금호동 헌책방 직원으로 다시 2년을 보낸 뒤 헌책방을 열어 15년간 꾸려왔다.

"헌책에 대한 첫 기억은 국민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애거사 크리스티 문고판을 너무 읽고 싶어서, 새책방에 가면 주인 아저씨들이 늘 혼냈죠. 청계천 헌책방에선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더라고요. 그때 새책방 사장님들이 잘해주셨다면 삶이 달라졌을 수 있어요.(웃음)"

윤 대표는 요즘 헌책에 적힌 메모를 모아 글을 쓰고 있다. 책 뒷면에 적힌 1995년 메모 하나가 재미있다. '이 책, 어느 인간에게 빌려주었는데, 또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모르겠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주문하다.' 그 옆에는 '도대체 주문을 언제 했는데… 이제 오다니'란 푸념이 적혀 있다.

"서삼치(書三痴)란 말 아세요? 책에 관한 세 가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해요. 첫째, 책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 둘째, 순순히 책 빌려주는 사람. 셋째, 빌려준 책을 돌려주거나 돌려받으려 하는 사람. 저 메모 주인은 정확히 서삼치 아니겠어요?(웃음) 주인을 거친 헌책엔 이야기가 남아 있어요. 새 책과 다른 점이죠."

그는 헌책방을 힘주어 재정의했다. "헌책방은 필요 없는 책을 버리듯이 갖다준 곳이라고 생각하시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정말 필요 없는 책은 폐지로 재활용되고, 헌책방은 한 명 이상의 주인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책이에요. 죽은 책들이 모인 공간이 아니라 진짜 생명력을 가진 책들의 공간이 헌책방이랍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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