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나 여우숲으로 오길 참 잘했다

한겨레 2022. 9. 2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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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김용규의 숲과 지혜]삶을 사랑하게 하는 숲으로의 초대
김용규 여우숲인문학교장. 김용규 제공

숲을 터전으로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20년에 가깝다. 돌아보니 모험하는 삶이라면 당연히 마주해야 할 것들을 차곡차곡 마주하며 산 시간이었다. 설레는 날이 많았고 더러 서러운 날도 있었다. 아마 인간의 삶도 숲과 같아서일 것이다. 돋아나고 싶은 것들은 반드시 어두운 땅을 뚫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돋아났고, 부러져야 할 것들은 세찬 바람에 무너지는 나뭇가지처럼 한사코 부러지고 말았다. 떠나야 할 것들은 변명을 두고 혹은 변명도 없이 떠나갔고, 다가와야 할 것들은 새로이 혹은 다시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서울에 살던 한때 높바람처럼 사나웠던 나는 숲과 함께한 세월을 거치며 가을 하늘 구름처럼 순해졌다. 내 삶이 가을 앞마당에 섰다. 가을은 확실히 풍요와 평화의 시절. 하지만 굴곡 없이 찾아오는 가을이 어디 있던가! 봄날에 돋운 잎은 눈부신 꽃을 피워내고 재빨리 열매로 맺지만, 기어코 가뭄과 폭우와 태풍의 고비들이 철따라 찾아오니, 겪어내야 할 것들을 다 겪으며 겨우 붙들어낸 것들만이 가을을 맞으며 익어간다. 그렇게 온갖 풍상을 견디고 나서야 찾아오는 가을은 비로소 평화의 시간이다. 물들어야 하는 자리는 모두 제 빛깔로 물들고, 가라앉아야 할 것들은 일제히 항복하듯 가라앉고, 또한 드러나야 할 것들이 드디어 소리 없이 드러나며 도처에서 가장 저다운 모습이 부끄러움 없이 드러나는 평화의 시간. 숲처럼 평화롭기에는 하염없이 멀지만 내 삶에도 소박한 가을이 찾아왔다. 삶의 가을을 맞으며 일어서는 한 생각이 있다. ‘숲으로 떠나오길 잘했다. 참 좋다.’

삶이 막 가을로 들어서는 오늘 나는 당신을 이 평화의 숲으로 초대하고 싶어졌다. 도처가 산이고 숲인 좁은 땅의 나라에서 고개만 돌리면 숲이거늘 ‘너 사는 숲은 무엇이 다르냐? 어째서 평화의 숲이냐?’ 당신은 캐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내가 사는 숲이라고 달리 특별할 건 없다. 이곳 충북 괴산의 ‘여우숲’도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산과 들, 계곡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는 생명 대다수의 그것처럼, 혹은 우리의 인생처럼 특별할 것 없는 듯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나와 함께 걷게 될 이 숲은 당신이 일생 한번도 마주한 적 없는 숲일 것이다. 마음을 열어 당신이 나의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당신과 함께 나란히 숲을 걷고 싶다. 늘 보던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평범한 흙과 풀과 나무와 바람과 구름과 비와 폭설과 햇살이 사실은 얼마나 새롭고 눈물겹고 신비로운 것들인지 보여주고 싶고 들려주고 싶다. 그래서 유혹한다. ‘Shall we walk?’

함께 걷기에 앞서 궁금하다. 당신이 얼마나 숲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는지, 그리고 어떤 가슴을 지키고 사는지. 당신의 일상이 마주하는 모든 장면에는 오늘도 아주 많은 신비가 흐르고 있다. 그대의 삶과 나란히 흐르고 있는 그 많은 신비를 당신의 가슴은 얼마나 잘 포착하며 살고 있는가? 또 당신의 하루는 얼마나 많은 감탄으로 채워지고 있는가? 떠올려 보라! 어린 시절에는 누구에게나 들렸던 말이 자연의 말이었고, 순간순간 넘쳐났던 것이 감탄 아니었던가!

충북 괴산 여우숲 전경. 여우숲 누리집 갈무리

누군가의 삶이 감탄을 잃었다면, 그리고 더는 신비를 발견하기 어렵게 되었다면 그 삶은 메말라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과 빛나는 외양, 화려한 명함을 가졌더라도 그 삶은 시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떠밀려 견디듯 하루하루를 살기 전까지는 우리에게도 넘쳐흘렀던 그 신비와 감탄의 날들이 지금은 혹시라도 사라진 지 아득하다면, 부탁이다. 잠시 마음을 내어 지금 당도한 이 숲으로의 초대장을 가만히 열어보시기 바란다. 숲 앞에 서면 당신의 귀에는 무엇이 들리는가? 내 귀에는 생명의 노래가 들려온다. 욕망하는 생명들, 그래서 부딪히고 뒤엉키며 살게 되고, 그 과정들이 빚어내게 되는 ‘살아있음의 박자와 리듬’이 두-둥둥 들려온다.

숲에 들면 당신에겐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느껴지는가? 당신은 숲에서 어떤 것들을 발견하고 느끼는가? 나의 몸뚱어리는 숲의 가장 낮은 바닥으로부터 하늘을 향해 솟구친 나무의 우듬지까지, 아니 우듬지 너머의 탁 트인 하늘에 이르기까지 촘촘히 채워져 있는 놀라운 신비들을 포착한다. 감히 표현하건대 나는 숲에서 날마다 신(神)의 입김을 느낀다. 무거운 땅을 극복하고 돋아나는 여린 새싹과 그것을 탐하여 꼬물꼬물 뜯어먹고 있는 애벌레의 움직임에서, 또한 그 긴장 관계를 넘어서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침내 피어난 한송이 꽃에서, 그리고 이파리를 뜯어먹던 애벌레가 이번에는 나풀대는 나비로 찾아와 그 꽃을 파고듦으로써 상처 견디고 피어난 꽃에게 열매로 가는 길을 선물로 안기며 꿀 한모금 머금고 떠나가는 기막힌 전환적 화해의 신비 속에서… 나는 신의 임재(臨在, presence)를 목격한다. 그러므로 나는 숲이 빚어내는 저 깊은 가르침을 더할 나위 없이 순한 귀로 가만가만 듣게 된다. 무자천서(無字天書), 옛사람들은 숲을 하늘이 지은 글자 없는 책이라 별명(別名)했다. 내게 저 말은 너무도 정확하고 놀라운 표현으로 다가온다. 눈 밝은 사람에게 숲은 그 자체로 깊이 있는 경전이다. 숲을 이루는 모든 존재들은 사시사철, 날마다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숲은 원형리정(元亨利貞), 생장수장(生長收藏), 춘하추동(春夏秋冬)의 리듬을 통해 하늘과 땅이 만나 빚어내는 아름다운 리듬을 사시사철, 날마다 보여주고 있다. 우주는 리듬이요, 삶 역시 그 리듬 위에 있어야 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 숲이다. 우리가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며 어디로 가는지, 그 알기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넌지시 건네고 있는 공간이 바로 숲이다. 숲의 긴 역사와 하루하루 속에는 나고 자라고 무언가를 이루고 죽기까지, 기쁘고 버겁고 때로 다투고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또 화해하고 꽃 피고 열매 맺고 아프고 죽어야만 하는, 우리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거의 모든 해답이 전사(mirroring)되어 있다. 바람에 눕는 풀이나 그 바닥을 지탱하며 사는 지렁이를 보다가, 혹은 땅속에서 굼벵이로 긴 세월의 어둠을 먹고 올라와 풀섶에 제 한때의 옷을 벗어 놓고 어느 나무에 기대어 한 여름 생을 노래한 뒤 먼 곳으로 떠나가는 매미의 가락을 듣다가. 이윽고 제 스스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알아채게 하는 공부! 생명과 생명 아닌 것들이 사방팔방으로 서로를 연결하며 빚어내는, 혹은 현재가 과거를 먹고 서서 다가오지 않은 날들로 향하고 있는, 쉬는 날 없이 윤회하고 있는 숲 공동체를 보면서 인간 공동체의 갈 길을 탐험하는 공부! 이것을 나는 ‘숲 인문학’이라 부른다. 요컨대 내가 말하는 ‘숲 인문학’은 숲을 통해 인간 실존의 문제와 인간 공동체의 방향을 탐색해가는 공부이다.

여우숲 인근에서 여우숲학교 참여자들이 숲 체험을 하고 있다. 여우숲 누리집 갈무리

이곳 ‘휴심정’을 통해 내가 안내할 무자천서로서의 숲 인문학이 담을 핵심 주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자면 그것은 ‘숲을 만나다, 삶을 사랑하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한 10년 정도 숲과 함께 산 뒤부터 내 대중강연의 주제는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숲을 만나는 일은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일을 넘어 마침내 자신과 타자를 사랑할 힘을 되찾는 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라는 점이었다. 고백하자면 내가 먼저 그렇게 되었다. 나는 숲의 가르침을 통해 비로소 무늬만 인간이었던 옷을 벗고 진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매미나 나비, 나방이 알과 애벌레와 번데기의 허물을 차례로 벗어내며 마침내 자신을 이루어내는 극적인 전환 같기도 했다. 나는 우선 자신의 삶과 불화했던 모든 지점을 받아들이고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스스로를 존중함을 넘어 나 아닌 존재 모두를 깊이 받들 수 있게 되었다. 은연중에 세계를 이해나 우열로, 아니면 좋거나 나쁜 것, 혹은 옳거나 그른 것들로 바라보고 있었던 관점이 속절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훈련받으며 나의 내면에 장착했던 저 이분법적 세계관을 숲은 마치 비가 먼지를 닦아내듯 닦아지게 했다. 숲을 통해 비로소 나는 더 순해졌고 자유로워졌다. 맞닥뜨린 가난 속에서도, 무시로 찾아오는 다채로운 곤경 속에서도 나는 나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날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높고 낮은 땅이 있고 크고 작은 나무와 풀이 있다지만, 또 마음껏 햇살을 받는 나무도 있고 빛 한 조각 받기도 어려운 풀이 있다지만, 숲 안에서 생명은 모두 대등하고 존엄한 존재로 서로 연결되어 하늘이 품부해둔 제 꽃을 화들짝 피움으로써 저마다 환하게 빛나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소식을 알아채게 되면서부터 나는 온전히 나를 바라보게 되었고 마침내 스스로를 더욱 깊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은 빛과 같아서 사방을 향해 자꾸 뻗어나가려 한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는 그러니 이제 타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나와 함께 긴 호흡으로 숲의 속살을 함께 걸었던 누군가도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어떤 이는 화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자신의 과거를 따뜻한 연민으로 품게 되었다고 했고, 어떤 이는 미워하는 마음 탓에 한 공간에 함께 지내는 것이 날마다 고역이 되어버린 남편을 마침내 품어 안을 수 있게 되었다고도 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버린 상태에서 엄마와 동생만 함께 살고 있다는 어느 초등학교 5학년의 아이는 나무와 풀들이 감당하면서 극복해내고 있는 삶의 고난과 역경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더니 이렇게 썼다. ‘나도 해낼 거예요. 나무와 풀처럼!’ 조현병을 앓고 있는 어느 잘생긴 청년은 ‘숲이 보여주는 신비가 자꾸 자기를 숲으로 부른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가 처한 상황이나 상태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숲이라는 글자 없는 책을 뜨문뜨문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걸었던 이들은 모두 최소한 잃어가던 생명성을 되찾는 것이 출발점임을 알아챘다.

나의 유혹어린 초대장에 마음이 끌리는가? 그렇다면 이제 산책에 나설 시간이다. 길을 나서기에 앞서 당신에게 드릴 정중한 부탁이 하나 있다. 다음을 기억하며 숲을 걷자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고 싶은 장소는 지겹도록 듣는 “숲에서 ‘힐링’하고 왔어요” 수준의 숲이 아니다. “이건 이름이 뭐예요?” 수준의 숲이 아니다. 지금부터 당신과 내가 숲을 만나는 일은 잃어버린 생명성을 회복하는 산책이요, 스스로를 사랑할 힘을 회복하여 마침내 이웃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되찾는 과정으로서의 숲 마주하기라는 점이다. 이것을 기억해두자!

거듭 밝히지만 ‘숲을 만나다 삶을 사랑하다’, 당신과 함께 나란히 걸으며 마침내 만나게 해주고 싶은 지점은 바로 저 문장 속에 있다. 당신이 진정 숲의 말을 듣게 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당신의 삶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타자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니 숲의 노래를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은 자신 아닌 존재를 사랑하는 기쁨마저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산책이 설레지 않는가? 설레도 좋을 것이다. 지혜와 사랑의 숲을 깊은 곳까지 산책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숲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삶과 화해하고 마침내 사랑할 수 있는 숲을 만나기 위해서는 약간의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머리에 의존함으로써 차가워진 가슴이라는 채널을 다시 덥히고 개방해야 한다. 이어지는 몇 꼭지의 연재는 우선 그 워밍업의 시간이 될 것이다.

글 김용규(여우숲인문학교장)

충북 괴산군 사오랑 외딴 산골에 있는 숲학교와 숙박시설을 갖춘 복합숲문화공간인 ‘여우숲’ 설립자다. 금융회사와 이동통신회사에 다니다 벤처 붐이 일던 2000년대 초반에 벤처 시이오를 하던 중 껍데기를 추구하는 삶을 견딜 수 없어 숲으로 들어갔다. 지은 책으로 ’숲에게 길을 묻다’, ’숲으로 온 편지’, ’당신이 숲으로 와준다면’ 등이 있다. happyforest@empas.com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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