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여전히 묻혀있는 조국의 아들들

2022. 9. 2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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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한반도청년미래포럼 대표·안민정책포럼 청년회원

필자가 '유해발굴'이라는 작업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2004년 개봉한 강재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서이다. 전쟁에서 동생을 먼저 후퇴시키고 돌아오지 못한 형의 유해를 어루만지며, 돌아와서 구두를 꼭 완성해 준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동생의 장면이 여전히 기억에 깊게 남아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현재까지도 최고의 전쟁영화 중 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쟁 속 형과 동생이라는 미시적인 이야기를 다루며, 많은 국민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던 영화였다.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내재한 시대적 특수성을 모두 내포하면서도 이를 겪어야 했던 개개인들의 경험들을 모두 보여주었다. '국가' 혹은 '거대 권력'이 이념을 기반으로 일으킨 물리적 충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개개인들의 생애를 각 등장인물들에게 적나라하게 녹여냈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북에서 부모님을 잃고 내려온 북쪽 사투리를 쓰는 국군, 진영 논리에 따라 사상적 의심을 받는 포로 청년들, 자원입대하는 학도병들, 먹어 살아남기 위해 '이념'이라는 단어도 모른 채 부역에 가담하거나 적군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진영이 바뀔 때마다 끌려가 학살당했던 사람들. 이렇게 전쟁, 특히나 한국전쟁은, 거대 권력의 이념 갈등을 기반으로 한 물리적 충돌만으로 단순히 규정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설명이다.

이는 그 속에서 희생되어야 했던 분들을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모든 분들을, 이념 갈등이 형성해 놓은 이분법적인 패러다임 속 특정 유형으로 규정해 버리기에는 그 논리가 매우 허술하며, 너무도 많은 모순들이 존재한다.

거대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김일성이라는 한 사람의 야욕이 전쟁이라는 가장 참혹한 인류의 산물을 한반도에 가져왔다. 명분은 '조국해방전쟁'이었다. 한 사람의 결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3년간 죽어나갔고, 그 시체들이 쌓이고 쌓여 산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전쟁은 일시 정지 상태로 돌입한다. 물리적 충돌을 막기 위한 물리적 분리 그리고 그 분리를 위한 완충 지역이 조성되었다.

휴전 협정 전까지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양 진영의 지도부는 수없이 많은 병력을 전선에 투입, 끊임없는 전투를 거행했다. 그렇게 수많은 전투지들은 시체들로 다지고 다져졌다. 고지들에는 수없이 퍼부어댄 포탄으로 인해 산림이 남아있지 않았고, 시체 위에 시체가, 그 위에 또 다른 시체가 쌓였지만, 병사들은 그 위로 다시 총을 들고 뛰어다녀야 했다

그렇게 전쟁은 일시 정지 상태로 들어갔다. 최전방 전선은 협정에 따라 그 참혹함을 그대로 내포한 채, 그 내부로 출입을 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방어 시설과 지뢰들이 그 위에 깔렸다. 그렇게 너무도 처절했던 3년간의 전쟁은 급하게 허리띠를 허겁지겁 졸라매듯이 국토의 중간을 '공백화' 시켜버렸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된다. 그렇게 우리의 선조들은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웠던 양 진영의 명령 속에서 처참히 생을 마감하셔야 했고, 그분들은 전선이었던 그 공백 지대에 차갑게 그대로 묻힌 채, 반세기 동안 돌아오지 못하셨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차갑게 묻혀있는 분들이 훨씬 더 많으시다. 얼마 전 사격 자세로 숨진 백마고지의 병사가 유해 감식에 의해 조응성 하사로 밝혀져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랬다. 이분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격 자세를 유지하셨다.

유해발굴감식단 통계에 의하면 2021년 기준, 국군 전사자 16만 2394명, 그중 현충원에 안장되신 분들은 2만 9000명이다. 즉, 13만 3000명이 실종 상태이시다. 유해발굴단은 2000년을 시작으로 현재 23년째 유해발굴 작업을 하면서 1만 1372구의 유해를 발굴해냈다. 하지만 신원이 확인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신 국군 용사분들의 수는 큰 충격을 줄 만큼이나 적다. 필자는 처음 이 통계를 보고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감았다 다시 뜨고 보았다. '190구'.

발굴의 시작부터 유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은 긴 여정의 길이다. 당시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전쟁에서 학도병까지 참전했다. 당시의 행정 시스템 수준으로 짐작했을 때, 전쟁에 참전자 기록 행정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현재 신원확인을 위해 군 장병들에게 배부되는 군번줄(군번과 이름이 새겨진 신분증)과 같은 표식이,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약 1년이 지난 뒤인 1951년에 최전방 부대 중, 그것도 전체가 아닌 일부의 병사들에게만 보급되었다고 한다. 주변에 남겨져 있는 그 외의 수통, 펜 등의 유품들로 신원을 확인하는 것 역시 한계가 있다고 한다.

고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전사자 유가족의 DNA 정보밖에 없다. 하지만 전쟁 70년 뒤, 남은 유가족 분들은 대부분 80세가 넘으신 노인분들이다. 또한 미혼으로 입대하여 직계 가족을 남기지 않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는 것이 조사 결과이다. 남편, 아들, 아버지, 동생, 오빠가 갑자기 전쟁터로 떠났고 그들이 어느 날 꼭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라고 믿으며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한 자리에서 기다리시다가 결국 생을 마감하셨다.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그 공동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가치관이 판단되고 결정된다고 한다. 미국은 운구 담당 장교가 직접 전사자의 유가족을 찾아가 장병의 전사를 통보하고 전사 통지서를 전달한다. 그 안에는 미 국방장관의 서명이 함께 들어가 있다. 시신 운구부터 장례까지 모두 국가가 이행한다. 유가족들에게 국가가 전사를 통보하고 나서야 언론에 보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국군 용사분들을 가족의 품으로, 아니 적어도 그 분들이 누구신지는 찾아내야 한다. 병적 기록과 전투 기록, 그 외의 모든 고문서들을 대조해서라도 그분들을 가족의 품으로, 혹은 국가가 품어드려야 한다.

이 과정이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중 하나이다. 이분들께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가족들을 지키고 자유를 수호하셨기에 우리는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희생되어 가신, 희생하신 분들을 더 이상 차가운 땅속에 앞으로도 계속 묻어둘 수는 없음을 알리는 바이다. 이 선대의 상처를 치료하며, 후대를 위해 우리의 역할을 해나가는 과정을 동료 청년들과 함께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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