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한 생명들의 일보전진

한겨레 2022. 9. 28. 18: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읽기]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주제로 ‘9·24기후정의행진’ 행사가 열린 지난 24일 오후 행진 참가자들이 서울 광화문 세종로 도로에 누워 다이-인(die-in) 시위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세상읽기]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지난주 토요일 서울시청역 인근에서 열린 9·24 기후정의행진 집회에 다녀왔다. 팬데믹으로 3년 만에 열린데다 걷기 좋은 가을 주말이었다지만, 3만5천명이라는 규모는 가히 놀라웠다. 나처럼 개인으로 온 사람도, 깃발과 손팻말을 정성껏 준비한 단체도 많았다. 아이와 부모, 중고등학생과 교사, 청년, 유학생, 개발현장 주민, 농민, 노동자, 이주자, 성소수자, 장애인, 쪽방 주민, 홈리스, 수녀님, 스님, 활동가, 반려견, 아무개 시민 등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생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외치고, 걷고, 도로에 드러누웠다.

주최 쪽은 ‘기후정의’라는 집회 주제를 “화석연료와 생명파괴 체제를 종식해야 한다”, “모든 불평등을 끝내야 한다”,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는 더 커져야 한다”는 3대 요구로 집약했다.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과 통치체제에 전면적인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급진적 요구다. 신기하게도 그런 급진성에 멈칫하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모두가 진지하게 발언을 경청하고, 각자 즐겁게, 열심히, 절박함을 담아 기후위기 현안을 공유하느라 바빴다. 아이들은 지구와 동물이 그려진 손팻말을 들고 신나게 뛰어다니고, 수녀님들은 앞장서서 탈석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촉구하고, “우리 미래 어쩜 이래”부터 “국제적인 계급투쟁만이 지구파괴를 멈출 수 있다”까지 손팻말에 적힌 다양한 외침이 두루 존중받는 희한한 자리였다. 그렇다고 모두가 환영받은 건 아니다. 정부, 기업, 거대 양당은 언제나 주류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만, 이날만은 ‘왕따’였다. 단상에 오른 발언자들은 기후위기에 무심하다 못해 개발과 성장에 대한 맹종을 부추기는 무리, ‘녹색’을 이윤창출의 프런티어로 전유하는 무리를 기후위기의 책임자로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기후재난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존재들뿐 아니라, 기후재난에 공모하지 않고선 생존이 힘든 산업현장의 노동자들까지 ‘기후위기 최전선 당사자’로 초대됐다는 점이다. 공공운수노조 금화피에스시(PSC)지부 소속 박종현씨는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한 지 10년째인 노동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기후위기 주범으로 지목된 발전소가 2030년엔 절반으로 줄어들 텐데, 폐쇄 이후 대책도, 노동자들의 미래에 관한 논의도 없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정의로운 전환이라 외치고 있지만, 저희는 어떻게 해야 정의로운지 모르겠습니다.” 환경을 인간 외부의 자연으로 둔 채 보호만 외쳤던 지난날의 운동에서라면 박씨는 파괴의 주범, 불가피한 희생양, 성가신 존재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지구 어디든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영세 공업단지, 공장식 축사, 대형 저인망 어선은 가장 저렴한 노동력으로 유지된다.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자리에선, 박씨 같은 기후파괴 현장의 노동자도, 그 현장에서 도륙되는 다른 생명도, 우리가 함께 책임지고 대담한 전환을 모색해야 할 환경의 일부가 된다.

3만5천명이 도심에 모였다고 당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이날의 사건은 현 정부의 ‘외교 참사’를 둘러싼 정치인들의 공방에, 고물가·고달러·고금리 등 경제위기를 알리는 경고음에 이미 묻혀가고 있다. 집회 참가자들이 하나로 똘똘 뭉치기보다 서로 반목하는 일도 많을 것이다. 공정, 성폭력, 차별금지법, 임신중단권, 동물권 등 최근 뜨거웠던 이슈들에 이들의 의견이 모두 일치했을 리 없다. 위선의 혐의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드물 것이다. 기후정의를 외친다고 재건축에 대한 기대, 육식 선호, 지방에 쌓여가는 기후파괴시설에 대한 무관심이 금세 사라질 리 없다.

하지만 나는 9월24일 광장에 모였던 다수가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아냥에 ‘잘 못하지만 한번 해보겠다’며 걸음을 떼는 사람들, 자신의 취약함을 인간 본성으로 돌리는 대신 비판과 성찰을 거듭하며 기후정의를 위해 일보 전진을 감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취약한 생명들한테 광장의 의미는 크다. 정치적 사안이 터질 때마다 날카로운 언어로 상대를 응징하는 데서 쾌감을 얻는 소셜미디어 속 마주침과 달리, 광장에서의 마주침은 상대의 표정에서 위로받고, 보잘것없는 개체가 서로 연결되고 차이를 조율해가면서 공동의 힘을 키운다. 9·24 기후정의행진의 선언처럼, 이렇게 관계성의 정치를 만들어가는 “우리가 길이고 우리가 대안이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