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할 자유'의 구속

박현철 2022. 9. 2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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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난 19일 오전 2030 정치공동체 청년하다를 비롯한 청년단체 회원들이 역무원 스토킹 범죄 사건이 일어난 서울 중구 신당역 10번 출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스토킹 범죄 피해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기에 앞서 고인을 추모하며 묵념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편집국에서] 박현철 | 콘텐츠기획부장

기자가 되고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아마도 ‘혐의’가 아닐까 한다. 수습기자 첫 교육은 경찰서에서 각종 사건사고 내용을 주워들으며 시작한다. 독자에게 가닿지 않는 교육용 기사를 쓰는 게 다음 단계. “서울○○경찰서는 9월29일 자동차 접촉사고로 시비가 붙어 감정이 격해진 끝에 상대 운전자를 폭행해 전치 4주의 부상을 입힌 박아무개씨를 입건했다고 밝혔다.” 이 정도라도 쓰면 다행이겠으나, 수습기자 열이면 열 모두 이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다.

이 교육용 기사는 반드시 고쳐 써야 한다. 피의자 이름 앞에 ‘혐의’란 단어가 빠졌다. 혐의란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을 뜻한다. 수사기관이 박씨를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수습기자의 교육을 맡은 선배 기자는 이렇게 일갈할 것이다. “박씨가 상대 운전자를 때리는 걸 니가 봤어?” 얄팍해 보이는 선배 기자의 말은 세가지를 알려준다. ①직접 보지 않은 내용을 사실로 단정하지 마라. ②수사기관의 일방적인 발표를 믿지 마라. ③형사소송 피고인(피의자)은 확정 판결이 나오기 전까진 무고한 사람으로 추정하라.

형사소송에서 ③을 가리켜 무죄추정의 원칙이라고 한다. 무죄를 추정한다…. 무죄로 추측한다는 말일까. 추정이란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그 반대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여 법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일’이다. 그러니까 검사가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고 법관이 이를 인정하기 전까지 무죄라는 법적 효력이 발생한다는 뜻. 더 나아가 유죄가 확정됐을 때 가할 수 있는 불이익을 피의자(피고인)에게 미리 줘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이해했다면 우리 형사소송법의 “불구속 수사 원칙”(198조)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여러 결정문에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인해 불구속 수사, 불구속 재판을 원칙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이를 밑천으로 기자는 피의자의 구속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라고 배운다. 수사 과정에서 구속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는지, 피의자를 벌주기 위함은 아닌지 따져 묻는다. 물론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의 구속은 공식적으로는 형벌이 아니다. 법률에 따라 수사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범위 안에서”(199조), 판사의 결정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구속을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이유는 당사자에게 구속은 유죄 확정 전이건, 유죄 확정 뒤건 사실상 형벌이기 때문이다. 또 수사 단계에서의 구속은 기본권(불구속 수사를 받을 권리) 침해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신당역 사건을 비롯한 최근의 스토킹 범죄들은 ‘구속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었다.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지난해 10월 이후 올해 6월까지 검찰이 처분한 스토킹 사건 3182건 가운데 피의자가 구속된 건수는 4.8%(154건)에 불과하다고 한다. 불구속 수사 원칙을 잘 지켰다고 검찰과 경찰을 칭찬할 수 있을까. 범죄 피의자의 기본권이 보장되던 같은 시각, 스토킹 피해자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이 사실은 기자들이 그동안 비판해왔던 ‘수사에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하는, 그러지 않으면 기본권 침해가 일어날 수 있는’ 구속 외에 다른 구속의 필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현행 법률에도 ‘법원은 구속사유를 심사할 때 피해자에 대한 위해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형사소송법 70조 2항)는 조항이 있다. 구속의 ‘보충적 고려 사항’으로 인식돼온 이 조항을 독자적인 구속 사유로 삼을 수 있게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경찰과 검찰은 22일 피해자를 해칠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 스토킹범의 구속 수사·기소를 원칙으로 삼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여론의 공분을 일으키는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검경은 그 여론을 등에 업고 ‘더 구속하겠다’는 대책을 반복해 발표해왔다. 언론은 당연히 검경 대책을 따져 물어야 하는데, 이번엔 쉽지가 않다. 피해자를 향한 강한 집착과 비뚤어진 지배욕을 바탕에 둔 스토킹 범죄는 그 특성상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위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 스토킹 범죄자의 자유는 ‘스토킹할 자유’로 이어질 수 있다. 구속이 능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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