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벗어라[편집실에서]

2022. 9. 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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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에게 왕위를 이양하겠노라.” 〈조선왕조실록〉을 전하는 책들을 보면 태종 이방원이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옥새를 넘기려 하자 세자빈이 “넙죽 받아들였다간 큰일난다”면서 뜯어말리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는 “전하의 양위 방침은 진심이 아니라 저하의 속내를 떠보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합니다. 양위를 둘러싼 태종의 줄다리기는 무려 4번(양녕과 3번, 충녕과 1번)이나 이어졌습니다.

꼭 조선시대 군주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민간의 권력 세습도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현대가(家)의 ‘왕자의난’, 롯데그룹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과 아들 동주(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동빈(롯데그룹 회장) 간에 얽히고설킨 경영권 분쟁, 동아제약 창립자 부자(강신호-강문석)의 경영권 갈등,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효성가(家)의 내홍 등 재계에선 잊을 만하면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질 않습니다.

선출권력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재임기간 주권을 위임받았지만 영원할 것처럼 파헤치고 갈아엎습니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은 거액을 들여 로고부터 바꾸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기더니 영빈관 신축에 878억원의 예산을 쓰겠답니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하루 만에 철회하긴 했습니다만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닙니다. 정책도 탈(脫)원전 등 전(前) 정권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고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동정이 조금씩 언론에 등장합니다. “잊힌 삶을 살겠다”던 퇴임 전의 다짐이 채 잉크도 마르지 않았다는 일갈도 따라붙습니다. 문 전 대통령이 최근 SNS를 통해 근황 소개, 서적 추천, 명절 인사 등을 하기는 했습니다. 신·구 권력 지지자들 간에 적정성 공방을 주고받습니다. 이게 과연 정쟁거리일까요. 퇴임 대통령은 그저 산골에 파묻혀 조용히 지내는 게 정말 바람직한 모습일까요. 가능하긴 합니까.

숱한 명망가들이 현업에서 물러난 뒤에도 사회적 활동을 이어갑니다. 뉴스가치에 따라 세간의 이목 정도가 달라질 뿐, 발언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전직 대통령도 자연인의 한 사람으로서, 깨어 있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현안에 대한 견해를 밝혀야 합니다. 발언 내용을 놓고 찬반 주장을 펼칠 수는 있겠습니다. 누구나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고 표현할 자유가 있으니까요.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96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습니다. 군주라는 특수성이 작용했다지만 서거 이틀 전까지 공식 업무를 수행했다죠. 살아 있는 한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사회적 역할을 하고픈 욕구는 동서고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입니다. 임기가 끝났다고 일체의 행보를 봉쇄하려는 시도는 건전한 퇴임 문화 조성 취지에 걸맞지 않을 뿐더러 현실성도 없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발언이 건강한 담론 형성 및 토론의 기폭제로 작용했으면 좋겠습니다.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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