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세계경제전망] 가스관 잠근 러시아, 원전 확대로 맞선 유럽

김동호 입력 2022. 9. 28. 00:49 수정 2022. 9. 2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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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vs 러시아 에너지 치킨게임


김동호 논설위원
스칸디나비아반도 동쪽의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 서부 유전지대는 최근 끝없는 불기둥을 내뿜고 있다.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러시아는 매일 1000만 달러(약 145억원)어치의 천연가스를 태워 없애고 있다. 태우지 않았다면 고스란히 독일로 수출되었을 천연가스다.

매장량이 막대한 러시아 천연가스는 땅속에서 끊임없이 솟구친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 봉쇄로 가스 수출을 중단하면서 남아도는 가스 소각이다. 매일 소각하는 천연가스 규모는 434만㎥에 달하기 때문에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막대하다. 과학자들이 북극의 빙하 해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할 정도다.

「 유럽, 에너지위기 속 결속력 강화
가로등 끄기 등 절전 캠페인 호응

프랑스, 원전 축소 정책 철회키로
독일에 가스 주고 전기와 맞교환

전쟁 종식돼도 러 의존도 낮아져
올겨울 지나면 승패 판가름날 듯

불기둥이 솟구치는 곳은 핀란드 남동부에서 가까운 러시아 제2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멀지 않다. 이곳은 발트해 동쪽 연안으로 유럽으로 보내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출발하는 곳이다. 노드스트롬I이 오래전부터 연결돼 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에는 신설되는 노드스트림II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상황이 급변하게 됐다.

러시아 엄포 놓고 있지만 힘 빠져

세계경제전망

그동안 독일은 녹색당을 껴안고 연립정부를 꾸려오는 바람에 탈원전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독일은 러시아 가스 수출의 최대 고객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서방이 러시아 제재에 나서면서 러시아와 유럽 간 에너지 거래는 사실상 중단됐다. 양측은 서로 ‘보이콧’ 중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양측의 서로 다른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러시아는 에너지 볼모가 된 유럽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수출 중단 카드를 던졌고, 유럽은 피 묻은 에너지를 수입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서로 팔지도 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서방과 러시아는 에너지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러시아가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는 경제의 핵심기둥인 에너지 수출이 가로막히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그동안 러시아에서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천연가스가 도달하는 기간은 이틀에 불과했다. 중국과 인도가 러시아를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별 도움이 안 되고 있다. 중국으로 연결된 파이프라인은 거리가 먼 탓에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중국에 도달하는 데는 35일이 소요된다. 더구나 중국이나 인도는 장삿속이 밝기 때문에 러시아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해 가격 후려치기에 나서고 있어 제값을 받지도 못하고 있다. 러시아는 시간이 갈수록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결국 러시아는 미국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NYT)는 “2014년 러시아는 크림반도 침공 때 서방의 경제 제재를 당하면서도 달러 부족 때문에 딱히 대응하지 못하고 낮은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면서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서 달러부터 대규모로 확보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우크라이나 침공 무렵 세계 4위에 달하는 6430억 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지난달 말에는 5668억 달러로 줄어든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더구나 이중 상당액이 미국에 의해 동결돼 있어 사용이 불가능하다.

종이호랑이 나토도 전력 강화

유럽은 에너지 비상에 걸렸지만, 똘똘 뭉치고 있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의 침공 초기엔 유럽의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 유럽연합(EU)의 결속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전망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하지만 유럽은 우려를 깨고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다. 사실상 종이호랑이로 보였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는 전력을 강화하고 있다. 6월 29일 스페인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선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이 확정됐다. 러시아는 거듭 핵전쟁을 거론하며 위협하고 있지만, 나토의 연대를 막지 못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결속이 EU의 단결을 주도하고 있다. 이에 맞춰 유럽 언론의 단결 메시지도 단호해졌다. FT는 사설을 통해 “러시아의 에너지 전쟁에 맞서 EU가 단일대오를 갖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푸틴이 가스 밸브를 계속 걸어 잠근다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EU의 리더들이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앞세운 자원 무기화로 유럽 각국을 위협하고 있지만, 오히려 EU의 단결력만 높이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는 원전 축소 방침을 철회하고 원전 발전 규모를 대폭 늘리고 나섰다. 무엇보다 천연가스 사용량의 55%를 러시아에 의존해 온 독일의 방향 전환이 주목된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국방비 지출 비중을 두 배로 늘리고, 석탄 발전을 늘리고 있다. 녹색당이 여전히 제동을 걸고 있지만, 3기밖에 안 남은 독일 내 원전 가동의 연장도 조심스럽게 검토되고 있다.

독일은 앙겔라 메르켈 정부 시절이던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전의 단계적 폐쇄를 약속했다. 올 연말 마지막 3기의 가동 종료를 끝으로 원자력 발전을 중단할 예정이었다. 정작 일본은 원전 가동을 확대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치솟는 에너지값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보도했다.

카풀 활성화, 대중교통 요금 할인

결국 러시아는 더 깊은 궁지로 몰릴 가능성이 커졌다. 푸틴은 서방이 경제 제재를 풀지 않으면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완전히 걸어 잠그겠다고 엄포를 놓고, 그래도 먹히지 않자 핵 사용 위협과 함께 병력 30만명 동원령을 내렸지만, 유럽 각국은 내친김에 탈(脫)러시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로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고 전쟁을 끝내지 않는 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는 물론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도 중단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5일 숄츠 총리와 화상 회담 후 “우리 두 나라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전기와 가스를 함께 나누어 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상황에 따라 프랑스는 독일에 가스를, 독일은 프랑스에 전기를 보내는 방식이다. 두 나라 모두 에너지 부족이 극심하지만, 프랑스는 전기 난방이 42%, 독일은 가스 난방이 50%에 이르기 때문에 서로 맞교환해 부족을 해소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프랑스 현지 르포를 통해 ‘에너지 긴축 시대’의 현장을 생생히 전달했다. 가로등을 꺼 놓아 컴컴해진 도시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흑백 사진 한 장은 러시아에 대한 유럽의 단호한 결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공장들도 핵심 영업시간이 아니면 바로 전등을 끄고 있다. 이 같은 프랑스의 에너지 절약 운동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50년 만이다. 겨울에는 실내 난방 온도를 18도로 유지하라는 정부 캠페인도 강화되고 있다. 독일을 비롯해 유럽 주요국에서 비슷한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근래 사라졌던 카풀이 다시 활성화하고 대중교통 할인요금제를 도입한 유럽 국가들도 늘어나고 있다. 프랑스의 에너지 절약 운동은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 지난달 유로존 전체의 물가상승률은 9.1%에 달했으나 프랑스는 6.5%에 머물렀다. 유럽 최대 원자력 발전소 EDF를 보유한 효과도 톡톡히 보고 있다. 원전을 줄여나가려던 프랑스는 EDF를 다시 국유화해 원전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자원의 무기화’ 위험성 가속

미국은 어부지리를 얻고 있다. 미국 석유회사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개시되자 일제히 러시아 유전 개발 사업에서 손을 뗐다. 수조 원에 달하는 자산을 포기하는 중대한 결단이었지만, 이들 기업의 주가는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언제 사업이 중단될지 모를 독재국가에선 사업을 접는 게 오히려 기업 전망을 밝게 하면서다.

더구나 미국은 러시아산이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빠져나간 만큼 매출을 늘리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미국의 요청에도 오히려 러시아를 두둔하면서 증산에 협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오히려 러시아산 가스를 사들이며 러시아 편을 들고 있다.

물론 푸틴의 무모한 도박과 유럽의 결속이 맞부딪히는 이 상황의 결말은 예단하기 어렵다. 러시아는 전쟁에서 물러나는 순간 패전과 함께 정권 몰락 위기에 몰리게 되고, 유럽은 자원 무기화의 위험성을 절감한 만큼 역시 물러설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프랑스·영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 뒤에서 미국이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치킨게임의 균형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는 난방유 부족 사태가 심각해질 올겨울을 지나봐야 윤곽이 드러날 것 같다.

김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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