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다섯 번 바뀔 동안 더 멀어진..순진한 희망인가"..'2차 송환'의 김동원 감독[인터뷰]

이혜인 기자 2022. 9. 2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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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째 비전향 장기수 담아
분단이 얼마나 비정상적 상황인지
관객이 영화 속에서 볼 수 있기를
영화 ‘2차 송환’의 김동원 감독. 이준헌 기자.

“1992년엔 ‘비전향 장기수’라는 말도 없었죠. 그냥 북한에서 온 ‘간첩 할아버지’라고 불렀어요.”

비전향 장기수는 북한 사회 사상과 체제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오랫동안 복역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김동원 감독은 1992년 자신이 살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비전향 장기수 두 명을 만났다. 당시 30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김석형·조창손씨의 이사를 우연히 돕게 됐다. “처음에는 간첩이라 하니까 호기심이 생겨서, 그다음엔 좋은 할아버지들인 것 같아 점점 친해지면서”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다가 ‘비전향 장기수’라는 사회 문제를 알게 됐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이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그해 9월 김씨와 조씨를 포함해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돌아갔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은 2004년 개봉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받는 등 외국 영화제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2022년, 김 감독이 후속편인 <2차 송환>을 들고 돌아왔다. 29일 개봉하는 <2차 송환>은 그 이후로도 북쪽에 돌아가지 못한 비전향 장기수 46명의 이야기를 다룬다. 고문과 회유로 인해 강제 전향서를 썼다가 다시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번복했다는 이유로 1차 송환 대상에서 제외된 30여명은 2001년 ‘폭력에 의한 전향 무효 선언’을 하고 ‘2차 송환’을 요구해왔다.

지난 26일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2차 송환> 개봉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고 말했다. <2차 송환>의 초반부에는 2000년 9월2일 63명이 북으로 송환되던 날의 영상이 나온다. “난 통일이 머지않았다고 믿었다. (…) 그 순진한 희망이 현실이 되고 난 이 작품을 진작 끝냈을지 모른다”는 감독의 내레이션과 함께다. 2차 송환도 머지않아 있을 것이라 믿었고, 김 감독은 속편에서 그 모습을 담으려고 계획했다. “2차 송환되는 모습을 촬영하거나, 조창손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북에 (촬영 허가를 받아) 방문해 북한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2차 송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속편에는 2차 송환을 기다리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생활이 담겼다. 2차 송환을 원했던 46명 중 생존자는 9명, 평균 나이 91세다. 김 감독은 “완성을 못할 것 같아서 크게 두 번 작업을 접으려고 했다”며 “결국 아무것도 마무리 못한 상태에서 영화 편집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영화가 세상에 나온 건 후련하지만 아쉬움이 많다”고 말했다.

<2차 송환> 속 비전향 장기수들은 북으로 돌아가기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영화의 주인공 격인 김영식씨(89)는 1962년 남파연락선의 무선수로 남쪽에 내려왔다가 붙잡혀 27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1988년 출소했다. 감옥에서 고문에 의해 전향서를 썼던 이력이 있어서 1차 송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여전히 그는 아들과 딸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걷다가 등에 칼이 꽂힐 것만 같은” 위협을 받으면서도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띠를 두르고 돌아다니고 청와대 앞에서 송환 요구 1인 시위도 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비전향 장기수들이 이토록 북쪽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 감독은 “제각기 이유가 달라서 한마디로 이야기하긴 어렵다”며 “어떤 분은 북에 남겨놓은 가족을 정말로 보고 싶어 하고, 어떤 분은 자신의 주장이 일종의 통일운동이라고 생각하시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분들은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옥살이를 다 했고, 옥살이를 끝냈다면 인도주의적인 이유에서라도 이분들이 가고 싶은 대로 보내주는 게 맞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지금보다 국가보안법의 적용이 엄격했던 시절부터 비전향 장기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김 감독은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 간첩 관련 조사에 주변 인물로 엮여서 남영동 대공분실에 붙잡혀가 심문을 받기도 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무섭거나 힘들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전에 88 올림픽 당시 철거민 문제를 다룬 <상계동 올림픽>을 찍을 땐 용역 깡패들한테 자해공갈까지 당했다”며 너털웃음으로 답했다.

‘이 같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30년 넘게 송환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물었다. 김 감독은 ‘송환’ 그 너머에 있는 ‘분단’이라는 현실을 조망하고 싶어 했다.

“<송환>을 보는 관객들에게 송환, 통일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달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더 근본적인 것은 분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상황인지 영화를 보는 분들이 느꼈으면 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분단이 너무 오래돼서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느끼고 있지만, 북쪽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고 통일에 대한 희망을 품은 사람들을 영화 속에서 보았으면 합니다.”

영화 ‘2차 송환’에 나오는 비전향 장기수 김영식씨. 시네마달 제공.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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