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보다 싼 파운드?..트러스의 '감세'가 일으킨 붕괴

조해영 2022. 9. 2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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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 빨간불]

26일(현지시각) 시민들이 영국 런던의 한 환전소 앞을 지나가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영국 파운드화의 추락이 계속되고 있다. 런던 관광지에선 1파운드화가 1달러보다 싸게 거래되기도 하면서 경제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국 경제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블룸버그>는 26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의 관광지인 레스터 광장에 있는 환전업체 체인지그룹 사무소에서 최근 100달러가 104파운드에 거래됐다고 보도했다. 관광지이기 때문에 은행 거래보다 높은 수수료가 붙어 나온 결과지만, 파운드화가 달러보다 싼 값에 거래됐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 영국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엄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이날 런던 외환시장에서 파운드화는 장중 1.03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가 소폭 회복하며 1.08달러 선에서 마감했다. 한 달 전만 해도 1.17달러 수준에서 거래됐지만, 신임 리즈 트러스 총리가 23일 1972년 이후 대규모 감세정책을 내놓으면서 급락이 이어지고 있다. <블룸버그>는 파운드와 달러의 가치가 1대 1로 대응하는 ‘패리티’가 6개월 이내에 무너질 확률이 22일 14%에서 26일 26%로 크게 높아졌다고 전했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내·외부 요인이 공존한다. 외부 요인으로는 미국이 40년 만의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연이어 금리를 인상하는 강도 높은 긴축 정책을 펴고 있는 점이 꼽힌다. 그로 인해 파운드화를 포함해 전 세계 대부분의 통화 가치가 동반 하락하는 중이다.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의 가치를 보여주는 지표인 달러인덱스는 26일 114선을 돌파하면서 20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하지만 최근 파운드화 가치 하락에 기름을 부은 것은 영국 정부다. 트러스 총리는 23일 2023년 4월 예정했던 법인세 인상(19%→25%) 인상 계획을 철회하고, 국민보험을 내리는 것을 뼈대로 한 새 예산안을 발표했다. 트러스 총리가 경선 시기 중에 내놓은 안을 보면 연간 300억파운드(약 46조1000억원) 정도의 감세가 이뤄질 것으로 예측됐지만, 소득세 인하 등이 추가되며 감세 규모가 커졌다. 그로 인해 정책 효과가 모두 드러나는 2026년엔 전체 감세 규모가 연간 450억파운드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는 한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해 올겨울 난방비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일반 가정·기업에 에너지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6개월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600억파운드가 든다. 이런 내용을 모두 합치면, 1972년 이후 50년 만의 최대 감세정책라는 평가가 나온다.

시장은 이를 파운드화 가치 급락을 예고하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정부가 재원을 마련하려면, 국채를 발행하거나 세금을 인상해야 한다. 세금을 내리니 기댈 곳은 빚밖에 없다. 영국 정부는 2022년 국채 발행액을 애초보다 50% 늘어난 624억파운드로 늘이겠다고 했다. 감세를 통한 경제 활성화가 아니라 국가부채 급증으로 인한 재정건전성 우려만 부채질한 셈이다. 실제 국제통화기금(IMF)은 국내총생산의 80% 수준이던 영국의 국가부채가 2020년 이미 104%로 늘었다고 밝혔다. 영국 자산운용사 야누스 헨더슨의 글로벌 채권 포트폴리오 매니저 베사니 페인은 <로이터> 통신에 “정부 의제에서 비롯된 변화로 효과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경제에 대한 전망 없이 이러한 정책을 내놓은 것은 무책임하다”고 평가했다.

시장의 눈은 자연스럽게 중앙은행을 향하고 있다.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은 파운드화 추락이 이어지자 26일 성명을 내 “중기적으로 목표 인플레이션을 2%로 되돌리기 위해 필요한 만큼 금리를 바꾸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11월3일 예정된 다음 통화정책위원회에서 “정부의 발표가 수요와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 파운드화 가치 하락에 대해 평가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밝히는 데 그쳐 시장 불안을 잠재우진 못했다. <비비시>(BBC) 방송은 “일부 경제학자들은 중앙은행이 물가 상승을 잡고 파운드화 하락을 막기 위해 며칠 안에 긴급회의를 소집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중앙은행은 (긴급회의 대신) ‘다음 회의에서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고 전했다.

강달러라는 외부 요인과 감세 등 정책 변화와 맞물리며, 영국의 인플레이션 잡기는 더 까다로워질 전망이다. 영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6월 9.4%, 7월 10.1%, 8월 9.9% 등으로 고공행진 중이다.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입품은 물론이고 달러로 거래되는 에너지 가격도 오를 수 있다. 영국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압력이 이어지면서 8월과 9월 두 번 연속으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하는 ‘빅스텝’을 밟았다. 현재 영국의 기준금리는 2.25%다.

조해영 기자 hy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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