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민심이 용산 덮치기 전에, 윤 대통령이 해야 할 일 [조성식의 통찰]

조성식 입력 2022. 9. 27.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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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의 통찰] 정권 2인자와 검찰의 자세

[조성식 기자]

 검찰
ⓒ 연합뉴스
검찰이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공정한 수사로 정권 비리를 단죄했을 때다. 이런 수사는 정치적 논란을 떠나 대체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그럴 때 검찰은 본분을 다하는 듯싶었다. 권력기관이 아닌 수사기관으로서 말이다. 착시도 있었지만, 대체로 정권과 맞설 때는 정의로워 보였다. 반대로 정권과 한 몸일 때는 추해 보였다. 윤석열 정부의 검찰은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검찰이 빛나던 시절

노무현 정부 초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성공한 수사의 전형으로 꼽힌다. 수사 명분이 뚜렷하고 성과도 좋았다. 안대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지휘한 이 수사는 이른바 '살권수(살아있는 권력 수사)'의 표상이라 할 만했다. 검찰은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의 대선자금을 파헤쳐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정권을 곤경에 빠트렸다. 대통령의 핵심 측근, 정권 실세, 대선 공신이 줄줄이 구속되고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개혁을 추진하는 진보적 정권에 대한 검찰의 선제공격이라는 부정적 시각도 있었지만, 검찰은 여야에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 형평성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형식에서는 야당의 부패가 단연 돋보였다. 검찰 수사로 드러난 한나라당의 불법 정치자금은 823억 원, 여당은 119억 원이었다. '차떼기 당'이라는 오명을 얻은 한나라당은 여의도에 '천막당사'를 차리는 촌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내용에서는 여권의 내상이 훨씬 깊었다. 힘겨운 승부 끝에 가까스로 정권을 잡아 정치개혁, 검찰개혁, 언론개혁, 사학개혁 등 갖가지 개혁정책에 드라이브를 걸 시점에 정권의 도덕성에 금이 가니 국정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여파로 구여권(새천년민주당)과 신여권(열린우리당)의 분열이 깊어지고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 발언과 측근 비리에 대한 사과 거부로 탄핵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정치적 공방과 별개로 이 수사 덕분에 노무현 정부 검찰은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 중립성과 수사 독립성을 확보했다는 평을 들었다. 검찰의 힘이 세지는 바람에 정권이 의도한 검찰개혁은 실패했지만, 고질적인 정경유착 비리를 파헤쳤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후 정치자금법이 개정돼 정치권과 기업 간 음성적인 정치자금 수수 관행에 큰 변화가 생긴 점도 이 수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뒷받침한다.

헌법 84조.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헌법 조항이 아니더라도, 대통령이 재임 중 중대 범죄로 기소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정 공백이 발생하고 나라에 큰 혼란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안대희 중수부장이 대통령 측근 비리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말이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이번 수사의 초점은 대통령 측근이지만, 대통령이 관여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가 원수이고 예우를 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은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

비상한 각오
 
 2004년 9월 8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가 불법 자금 수수 혐의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됐다.
ⓒ 권우성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를 수사하려면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다. 정치 성향을 떠나 국민 누구나 공감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절제와 균형도 갖춰야 한다. 헌법 84조에 규정된 예외적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한 대통령은 기소할 수 없기에 수사의 실효성이 없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간 권력 수사의 최대치가 2인자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2인자 중에는 대통령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종종 포함됐다.

검찰이 '성역'인 대통령 가족에 처음 칼을 뽑아 든 것은 김영삼 정부 때다. 대선 공신이기도 한 김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였다. 임기 초반부터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 장성, 기업인이 현철씨에게 줄 선다는 소문이 돌았다. 권력 사유화, 인사/이권 개입 등 갖가지 의혹에 휩싸이더니 정권 말기인 1997년 한보그룹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

대통령은 수사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청와대, 안전기획부, 법무부 등 권력기관들은 어떻게든 현철씨 구속을 막으려 했다. 수사 사령탑인 심재륜 대검 중수부장을 안기부가 뒷조사하고 수사팀이 안기부에 경고하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뚝심과 배짱이 남달랐던 심 부장은 법무부 장관의 압력에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맞섰다. 결국 현철씨는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됐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 아들을 구속한 수사팀은 '드림팀'으로 불리고, 심 부장은 '국민 중수부장'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검찰은 현직 대통령의 아들을 둘이나 구속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2002년 차남 홍업씨와 3남 홍걸씨가 각각 이용호 게이트와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돼 거액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검찰이 정권의 압박을 견딜 수 있었던 데는 '선비'로 불렸던 이명재 검찰총장의 강직한 성품도 한몫했다. 대통령의 두 아들이 구속된 후 정권은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이명박 정부 때는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씨가 사법처리됐다. 2012년 대검 중수부(최재경 중수부장) 산하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최운식 단장)은 이씨를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했다. 현직 대통령의 형이 구속된 첫 사례였다. 당시 대검 중수부는 이씨 말고도 권력 실세로 통하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2차관 등을 잇달아 구속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대통령 가족 대신 '경제공동체'라는 최서원(최순실)씨가 구속됐다. 최씨가 권력 서열 1위, 그녀의 남편 정윤회씨가 2위라는 풍문은 구중궁궐의 '여왕'을 불안하고 위태롭게 했다.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지휘한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최씨를 구속한 뒤 박 대통령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현직 대통령이 피의자로 입건된 첫 사례였다. 검찰이 박 대통령을 구속한 것은 국정농단 특검 수사가 끝나고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으로 파면된 직후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권력 2인자로 불리는 사람이 딱히 없었다. 몇몇 정치인이 정권 실세로 거론되기는 했지만, 역대 정권에 비하면 위상과 존재감이 약했다. 다들 고만고만했다. 대선 때 공이 컸다는 양정철씨에게 '비선 실세'라는 호칭이 따라붙었으나 수사 대상에 오르지는 않았다. 양씨는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을 지낼 때 친분을 쌓고 그가 검찰총장에 오르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수사를 '살권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억지스럽다. 조 전 장관이 전통적 의미의 권력 실세도 아니었던 데다 수사 내용도 권력형 비리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보 명망가와 그 부인의 부도덕한 행위에 실망하고 분노했더라도, 의도가 미심쩍고 과정과 결과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먼지떨이 수사를 살권수로 미화하는 건 지나치다.

역대 정부 사례를 보면, 2인자를 비롯한 권력 실세들이 구속된 것은 대부분 정권 말기다. 권력 실세에게는 초반부터 청탁과 이권이 몰리는 법이다. 권력형 비리가 싹트게 마련이다. 검찰은 서슬 퍼런 정권 초기에는 '감히' 건드리지 못하다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는 말기에 칼을 빼 들곤 했다. 권력 향방에 민감한 검찰의 생리이자 생존법이기도 했다.

대통령과 정권과 나라가 살길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이원석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만약 검찰이 정권 초기 권력 실세들의 비리 의혹을 엄정하게 수사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대통령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높아졌을 테고, 임기 말에 민심 이반으로 국정 동력을 상실하거나 정권이 붕괴하는 사태를 방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검찰은 하이에나와 같은 속성으로 국민의 불신을 자초하기 일쑤였다. 초반에는 죽은 권력을 물어뜯고 후반에는 힘 빠진 산 권력을 건드렸다.

윤석열 정부 검찰도 그런 방향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한쪽 눈을 감은 듯한 경찰을 동반자 삼아 전 정권과 야당의 전 대선 후보 관련 수사에는 표범처럼 달려들고, 현 정권 관련 수사에는 굼벵이 걸음이다. BBK와 다스 비리를 덮은 후 청와대 하명수사에 충실하고 전 정권 손보기에 여념이 없던 이명박 정부의 검찰과 어쩜 그리 닮았는지. 검찰이 빛나던 때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려고 작정한 듯싶다.

윤석열 정부는 검찰 수사권 축소라는 국회의 입법 취지에 반하는 시행령을 만들어 수사/기소 분리 논쟁을 원점으로 되돌렸다. 정권이 바뀌면 또다시 뒤집힐지 모르겠지만, 굳이 검찰이 정의와 공정을 외치면서 직접수사를 확대하겠다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작은 바람이 있다. 검찰이 빛나던 때를 상기하라고.

국민 신뢰를 잃은 검찰이 다시 사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영역 다툼하듯이 수사권 확대에만 골몰하지 말고 그것을 공정하게 행사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공정하지 않은 수사는 하지 않음만 못하다.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른 것이다. 공평은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게 힘들다면 수사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깡패 못 잡더라도, 그것이 국민에게 이롭다.

'정의의 수호신'을 자처하는 검찰이 권력과 손잡고 선택적 정의를 실현하는 걸 지켜보는 건 고역이다. 기울어진 검찰의 저울은 당장은 힘을 가진 쪽에 유리할지 모른다. 하지만 길게 보면 정권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앵무새처럼 법과 원칙을 되뇌는 법무부 장관의 말이 허공에 흩날리는 이유다.

따지고 보면 검찰 잘못만도 아니다. 보수든 진보든,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 검찰을 한편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 점에서 문재인 정부도 비판받을 점이 있다. 어느 쪽이 정권을 잡든, 세계적으로 막강한 검찰권을 분산해야 하는 이유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불법 요양병원 급여 편취 혐의로 재판을 받던 장모 최은순씨가 법정 구속되자 "법 적용에 누구나 예외가 없다"고 호기롭게 외쳤다. 검찰은 혹시 대통령 말에 어긋나는 '예외 사례'가 있는지 점검해보기를 바란다.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계급이 있는지.

정권 초부터 국정 난맥상을 보이는 이 정부에서 특권을 행사하는 권력 실세는 누구이고, 2인자는 누구인가? 임기 말도 아닌데 벌써 권력 서열을 풍자하는 이야기가 민심의 파도를 타는 현상이 심상찮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찰주의자들이 유난히 강조하는 공정의 반대인 특권과 특혜가 이 정부의 발목을 잡을 조짐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뻔하다. 대통령과 정권과 나라가 살길이 무엇인지, 성난 민심의 해일이 용산을 덮치기 전에 대통령 참모들은 특단의 대책을 강구할 때다. 마음에 안 드는 검사 바꾸거나 언론 입 막을 생각은 그만두고.

한때 검찰이 빛났던 것은 힘이 세서가 아니라 올바른 자세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검찰공화국이라 해도 검사들이 정권과 공동운명체처럼 행동한다면 역사적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검사 선서)가 <비밀의 숲>(JTBC 드라마)에만 존재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열흘 동안 붉은 꽃 없고 영원한 권력 없다(花無十日紅 權不十年). 5년 금방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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