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촬영 피해자의 고통은 '양형 변수'조차 되지 못했다
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과 같은 강력범죄 가운데 발생 비율이 가장 높은 범죄는 성폭력 범죄다. 대검찰청의 ‘범죄분석’ 통계를 보면, ‘강력범죄(흉악)’에서 성폭력 범죄 비중은 2011년 75.4%에서 2020년 91.7%로 높아졌다. 검찰은 성폭력 범죄 비중이 높아진 원인으로 강제추행과 함께 불법촬영 범죄가 증가한 것을 꼽는다.
이처럼 불법촬영 범죄가 늘고, 그 피해가 심각해지는데도 법원이 피해자의 정신적·심리적 고통을 살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불법촬영 범죄자의 형량을 정할 때 법원이 동종 전과 여부와 같은 ‘가해자 중심 변수’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분석이다.
27일 대한범죄학회 학술지 <한국범죄학>에 실린 논문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 형종(형의 종류) 결정의 영향 요인’(안재경 경찰대학 범죄학과 박사과정)이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 논문은 성폭력처벌법의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불법촬영 범죄)만 적용된 재판의 결과를 분석했다. 분석 대상은 최근 3년(2020년 3월∼올해 2월) 동안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된 1심 판결문 503건이다. 1심 선고 분석 결과를 보면, 징역형 집행유예(집행유예)가 308건(61.2%)으로 가장 많았고 벌금형이 120건(23.9%), 징역형이 75건(14.9%)이었다. 같은 기간 무죄가 선고된 사건 2건은 분석에서 제외됐다.
나체 아닌 불법촬영엔 벌금형 선고하는 경향
논문은 집행유예 사건(308건)과 벌금형 사건(120건)을 가해자가 피해자의 나체를 불법촬영했는지 여부와 피해자 수 등을 변수로 해서 살펴봤다. 그 결과 가해자의 불법촬영물이 ‘나체 불법촬영’이 아닌 경우, 재판부가 집행유예보다 가벼운 벌금형을 선고하는 경향을 보였다. 나체 불법촬영이 아닌 사건(202건) 가운데 집행유예 비율은 65.3%(132건)이고 벌금형 비율은 34.7%(70건)였다. 반면 나체 불법촬영에 해당하는 사건 226건 가운데 벌금형 비중은 22.1%(50건)였고, 집행유예 비중은 77.9%(176건)로 조사됐다.
나체 불법촬영 사건(226건)에 대한 분석을 보면, 피해자가 다수인 사건(59건)에서 집행유예 비율은 89.8%(53건)였고, 벌금형 비율은 10.2%(6건)였다. 그런데 피해자가 1명인 사건(167건)에서 벌금형 비율은 26.3%(44건)로 증가했다. 연구진은 “성관계 또는 탈의하는 장면 등 피해자의 내밀한 신체 장면이 촬영됐는지와 같은 불법촬영물 ‘내용’보다는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정보들을 기준으로 양정(형벌의 종류와 양을 정하는 것)이 이뤄진 결과, 피해자 수가 1명인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인 벌금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논문은 또 집행유예 사건(380건)과 징역형 사건(75건)을 가해자의 동종 전과 유무, 옷을 걷거나 하는 등의 행위 없이 육안 관찰이 가능한 피해자 신체를 불법촬영했는지 여부, 피해자 수 등을 변수로 설정하고 비교 분석했다.
동종 전과가 있을 때 집행유예보다는 무거운 징역형이 선고되는 비율이 더 높았다. 가해자가 동종 전과가 있는 사건(63건) 가운데 징역형 비율은 44.4%(29건)이고, 집행유예 비율은 55.6%(38건)였다. 반면 가해자가 초범인 사건(320건)의 징역형 비율은 14.7%(47건)로 더 낮았다.
그런데 법원은 심각한 가해 행위에도 초범이면 가벼운 선고를 내리는 경향을 보였다. 육안 관찰이 가능한 피해자 신체를 불법촬영을 하고 피해자가 여럿이더라도 가해자가 초범이면 재판부는 대부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와 같은 사건에서 가해자가 초범인 사건이 57건 있었는데, 이들에게징역형이 선고된 비율은 3.5%(2건)뿐이었다. 집행유예 비율은 96.5%(55건)였다. 동종 전과자가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건(33건)에서 집행유예 비율은 50.0%(10건)으로 줄고, 징역형 비율은 50.0%(10건)으로 늘었다.
연구진은 “집행유예와 징역형의 판단이 달라지는 것은 가해자의 동종 전과 여부에 따른 영향인 것으로 분석된다”며 “실제 법원이 판결문에는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신체 촬영 여부’를 (양형) 판단 이유로 언급은 하고 있지만, 이것이 실제 (양형) 판단에 영향을 주는 주요 변수로서는 기능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불법촬영 피해자의 고통은 변수로 작용하지 않아”
불법촬영 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관행은 바뀌지 않았다. 성폭력처벌법은 불법촬영 범죄를 징역 7년 이하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정하고 있다. 그런데 논문이 제시한 형종별 선고 형량을 보면, 집행유예 선고 때 형량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22.1%)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20.2%)이 많았다. 벌금형이 선고된 사건에서는 벌금 500만원(33.4%)이 가장 많았고, 징역형 사건에서는 징역 8개월(29.4%)과 징역 1년(25.4%)이 주를 이뤘다.
논문은 법원이 불법촬영 범죄자의 형의 종류과 형량을 정할 때 피해자의 ‘심리적 고통’ 같은 요인들은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법원은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의 구성 요건에 해당하는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 자체와는 본질적인 관련성이 떨어지는 피해자 수, 가해자의 동종 전과 여부, 범행 장소 등과 같은 요인들을 보다 주요하게 고려하고 있다”며 “불법촬영 대상자의 내밀한 신체 장면이 촬영되거나 피해자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요소들이 양형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작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통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일반인의 관점에서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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