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의 일터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다른 몸'은 '일그러진 몸'이 된다[플랫]

플랫팀 기자 입력 2022. 9. 26. 18:31 수정 2022. 10. 1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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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몸
캐런 메싱 지음, 김인아·류한소·박민영·유청희 옮김| 나름북스| 350쪽|1만7000원

저녁 7시,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 여성 노동자 다섯 명이 모여 앉았다. 이들은 건물에 전화선을 설치하거나 인터넷 연결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통신 기술자였다. 캐나다 퀘벡에서는 통신 기술직종에서 여성 노동자 수가 점점 줄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한 연구진 몇몇이 자리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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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두 시간 동안 참가자들은 나누고 싶은 말이 특별히 없는 듯 보였다. 여성 기술자가 남성 고객에게 종종 성추행을 당하는 일에 대해 묻자 참가자 중 샹탈은 “그 일이 자기를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한 건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작업 공구가 남성 노동자를 기준으로 너무 크게 맞춰진 것에 대해 묻자 조헨은 “그런 것은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 시간째가 되자 진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성 기술자들은 남자 고객의 성적인 농담과 모욕적 언사에 대처할 준비를 언제든 하고 있었다. 소피는 “(남성 고객들에게) 존중받기 위해 끊임없이 치러야 하는 전쟁이 지긋지긋해”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큰 공구 벨트 때문에 골반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캐나다의 인간공학자이자 생물학자인 캐런 메싱은 <일그러진 몸>에서 이 같은 일화를 소개하며 질문을 던진다. “왜 여성들이 사회적, 신체적 문제를 명명하거나 심지어 인정하는 것조차 꺼릴까?” 메싱이 트럭 운전사, 정원사, 정비사, 용접공 등의 여성 노동자와 만났을 때도 이들이 직접 경험한 문제를 꺼내놓기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는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기 전에 끔찍하고 용서할 수 없는 무능이나 개인적 실수 때문에 스스로 불행을 초래한 것이 아님을 확인받아야 하는 것 같았다”며 “우리 대부분이 젠더 차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남성에 비해 크기와 힘이 열등한 ‘제2의 몸’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여성들이 ‘다른 몸’에 대한 이야기하길 꺼린다는 것이다.

2010년 서울대병원 본관 병동의 한 배선실 창가에서 간병노동자들이 선 채로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서성일기자

메싱은 페미니스트이자 생물학자이며, 현장 기반 연구자다. 그는 수십년간 여러 노동현장을 누비며 전기통신, 조경, 간병, 청소, 서빙, 제조업, 돌봄서비스 등 분야의 여성 노동자들을 만났다. 남성 중심으로 설계된 일터 환경에서 ‘다른 몸’인 여성이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관찰했다.

1991년 그는 한 병원에서 간병노동자들의 직무특성을 연구했다. 당시 병원에서는 성별에 따라 간병노동 직무를 구분했다. 환자를 옮기거나 공격적인 환자를 제지하는 등의 ‘무거운 일’은 주로 남성 노동자가, 환자의 옷을 입히고 씻기거나 식사를 돕는 ‘가벼운 일’은 주로 여성 노동자가 했다. ‘무거운 일’이 더 힘든 일로 여겨져 보수가 높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가벼운 일’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에 비해 시간당 30% 더 많은 육체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무거운 일’에 비해 ‘가벼운 일’의 동작이 더 다양하고 심하게 뒤틀리는 경우가 많았기에 여성이 남성보다 30% 높은 업무상 사고율을 보였다.

일그러진 몸

캐나다 식당의 서빙 노동자 중 79%가 여성이다. 여성 서버들은 남성 서버들보다 고객의 요구에 더 세심하고 신속하게 반응하기를 요구받았고, 본업무가 아닌 주방일도 더 많이 보조했다. 같은 근무조에 있는 여성은 남성보다 총 이동거리가 3배 많았다. 이들은 만성적인 발과 발목 통증에 시달렸다. 메싱은 “(여성들은) 직장에서 같은 방식으로 신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더 많은 증상으로 고통받고 있었다”고 짚는다. “남성과 여성의 암 또는 근골격계 질환 위험은 동일한 직업 내에서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터에서 젠더적 특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메싱은 여성과 남성의 성별 차이가 전혀 없다며 직무에서의 동일성만을 강조하는 ‘동일성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직무를 분리해야 한다는 ‘차이 페미니스트’의 주장을 소개한다. 그리고 둘 다 답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메싱은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동의하는 데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고 본다. 우선 일터에 과학적·기술적으로 접근해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다수가 남성인 직장에 여성이 들어갔을 때 그곳에 있는 남성처럼 일하라는 고용주들에게 일터에서의 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변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연대’하고 지지하는 일이다. 메싱은 “일터에서 억압, 사고, 재해를 겪어온 수백만의 저임금 여성들은 성적 차이를 거부하는 것도, 강조하는 것도 도움이 된 적 없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라며 “(그러나) 일하는 여성들은 변화를 주장하기 위해 모여야 한다. 여성이 여성이라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으면 우리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혜인 기자 hyei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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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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