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돋보기] 역사의 흔적과 궤를 같이하는 부동산 변화

우병탁 입력 2022. 9. 2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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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주택 특유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상권이 발달한 익선동 일대. 사진 셔터스톡
이국적인 분위기의 독특한 상권이 발달한 경리단길.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우병탁 신한은행 WM 컨설팅센터 부동산팀장 2006년 제43회 세무사, ‘아파트 한 채부터시작하는 부동산 절세’ 저자

서울 구도심 종로와 세운상가

부동산의 발달과 변화, 이를 바탕으로 한 상권의 변화는 결국 부동산을 둘러싼 역사의 영향을 받는다. 1960년대 개발된 세운상가는 일제 말기 서울(당시 명칭은 경성)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실시된 방공 도시계획에 의한 공지(空地)에서 시작된 것이다. 전쟁 시 폭격에 의한 화재로부터 도시가 연소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방공(防空)을 위한 공지대(空地帶)로 설치된 공간이 해방 후 무허가 건물지대가 됐다가 그 후 세운상가로 개발된 것이다. 방공 공지대는 1941년 일본 제국에서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제정된 방공법과 1943년의 개정 법률에 의해 설정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부동산의 상당수는 모두 이처럼 과거의 역사적 흔적을 안고 있다.

 

대한민국 최대 상권, 명동

명동은 구한말~대한제국 시절부터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가로(街路)로 발달해왔다. 전쟁 이후에도 금융과 문화, 상업의 중심으로서 기능해왔다. 도심 안쪽에 위치한 입지도 입지지만 다수의 금융 회사 본점이 이곳에 자리 잡았고 명동성당과 옛 국립극장 등 요즘 말로 사람이 모여드는 주요 시설과 건축물이 있었다. 1970년대까지는 수많은 다방이 이곳을 중심으로 영업하기도 했다. 2000년 이후 일본과 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지로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 상권으로 성장했다. 다만 명동 상권의 경우 이 과정에서 기존 내수 중심 상권이 관광객 중심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가 공교롭게도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유행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상권이 되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상권 특성상 내국인 수요 유지에 제한적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코로나19의 유행 상황이 완화되고 다시 하늘길이 열리면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명동은 그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교육 1번지, 대치동

대치동 학원가의 형성은 크게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강남 개발 과정에서 기존 서울(오늘날의 강북 도심)의 명문 학교를 강남으로 이전시킨 것이다. 이후 강남은 고등학교 학군을 기준으로 이른바 8학군으로 편제됐다. 다른 하나는 유흥시설의 강북 도심 신규 입점 제한과 기업들의 강남(주로 신사, 논현 일대) 이전이다. 이 과정에서 한강 이남에서 테헤란로 이북에 해당하는 공간, 신사와 논현 일대에 유흥시설이 대거 유입됐다. 역으로 테헤란로 이남 쪽으로는 유흥시설 입점이 제한됐다. 결국 이러한 역사적, 법적 흔적이 오늘날의 지역, 상권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남은 것이다.

 

상권의 흥망성쇠와 부활, 북촌

북촌은 조선 건국 초기 이후 궁궐을 중심으로 그 가까이에 형성된 곳이다. 왕실 가족들과 고위관료인 양반들이 이 지역에 집을 지어 거주했다. 고관대작과 양반들의 주거지였던 만큼 대지 면적과 가옥 규모가 모두 컸고 당연히 당시에도 가격이 비쌌다. 도성 안 명동 일대 평범한 가옥 한 채가 2000냥이었던 데 비해 북촌 소재 대갓집의 경우 2만냥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쟁을 거치면서 북촌의 한옥 중 다수가 분할되어 다시 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조선 시대와는 달라졌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한옥 대갓집이 유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로 말미암아 2000년대 중반 이후 이 지역 특유의 한옥들이 가진 분위기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됐다. 이른바 삼청동 상권이다. 경복궁 우측 경계 동십자각 바깥으로 오늘날 안국역 위쪽으로 소격동, 화동, 팔판동, 삼청동까지 이르는 지역에 한옥 자체를 상업시설로 변경하거나 현대적이지만 한편으론 고색적인 분위기의 가게들이 상권을 형성했다. 재동, 가회동, 계동까지 범위를 넓혀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삼청동 상권은 점차 상권으로서의 인기를 잃고 침체됐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트렌드형 상권으로 성장한 곳은 상권이 성숙기에 이른 후 새롭게 성장하는 다른 상권에 빠르게 자리를 내주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북촌은 여전히 중요한 상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후에 성장한 익선동에 일정 부분 고객층을 빼앗겼다. 그리고 임대료 상승의 점진적인 뒷받침 없이 단기간에 지가만 높이 상승해 영업이 유지되기 힘든 구조로 바뀐 점도 상권 쇠락의 원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래된 것을 찾는 새로운 트렌드, 익선동

익선동은 서울 도심에서 삼청동 상권의 후속 상권 개념으로 성장한 곳이다. 상권의 발달 과정이 북촌 상권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북촌 일대가 조선 시대 고관대작들의 전형적인 한옥 중심으로 존치된 건축물을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한 것과 같이 익선동 일대도 한옥밀집지역 특유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상권이 성장했다. 

다만 북촌의 한옥과 익선동의 한옥은 건축적 특징에서는 차이가 있다. 익선동의 한옥은 북촌 한옥과 달리 개량형의 한옥이다. 건축학 측면에서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겠지만 우선 눈에 띄는 점은 규모가 작다는 점이다. 

한옥 본채와 별개로 담장이 따로 설치된 북촌 한옥과 달리 익선동의 한옥은 외벽이 담장을 겸하고 있다. 즉 한옥이지만 본채와 담장 사이에 넓은 공지를 두지 못하고 좁은 공간에 밀집돼 있다는 것이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기간에 기존의 각자 살기 위한 집을 짓던 양태에서 팔기 위한 집이 등장한 것이 오늘날 익선동 한옥의 모습을 이룬 결정적 요소다. 

경우에 따라선 기존의 넓은 대지 한옥 한 채 자리에 여러 채의 한옥을 이어 붙여 지은 경우도 있었다. 좁은 공간에 오밀조밀하게 집이 형성되다 보니 필연적으로 좁은 골목을 형성하게 됐다. 이러한 골목과 집의 구조가 익선동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익선동은 빠르게 성장한 상권이 됐다. 

한편 북촌 삼청동 상권과 마찬가지로 지가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원주민 이탈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점은 상권 유지에 부정적인 면이다. 

 

트렌드 변화 주기 단축의 증거, 경리단길

경리단길은 국군재정관리단 입구 앞에서부터 남산 하얏트호텔까지 이어진 언덕길과 녹사평역 방향에 형성된 상권이다. 국군재정관리단은 과거 육군재정관리단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3군 각 경리단이 국방부 직속으로 통합된 곳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일대와 용산 지역 전체적으로 과거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기간에 일본군 부대의 주둔을 위해 설치된 광역의 부지였던 곳이다. 해방 이후에는 용산 각지에 미군 부대, 그리고 국군 각 부대가 자리 잡았다. 이후 2022년 현재 용산의 각 미군 부대는 순차로 이전하였지만 미군 부대를 배후로 하여 이태원 상권, 해방촌과 함께 이국적 분위기의 가게들이 형성되면서 상권이 발달했다. 하지만 단기간에 성장한 경리단길은 역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보이며 상권이 빠르게 침체되기도 했다.

 

부동산과 역사

현시점에서 이미 발달된 주요 상권들의 모습을 보면 과거에 어떠한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이후에 새롭게 성장하게 될 상권의 단초도 분명 일정 시점의 역사와 맞물려 형성될 것이다. 역사란 지나고 나서 보면 과거이지만 아직 지나기 전에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 현실이다. 오늘의 현실로부터 미래의 상권과 부동산의 발달을 살펴볼 수 있는 혜안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같이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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