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글이 되는 음악] K팝 아이돌 대부, 이수만의 50년
9월 16일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주가가 급등했다. 그 전날 6만4500원에 마감된 주가가 하루 만에 18.6% 상승해, 7만65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창립자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자신의 개인 회사인 ‘라이크기획’과 SM과의 프로듀싱 계약 조기 종료를 검토한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다.
지난해 여름에는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자신의 지분 18.73%를 모두 매각하며 경영권을 넘긴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장은 요동쳤다. 그러나 계절이 네 번 바뀌는 동안 인수 발표는 없었다.
협상 과정에서 ‘인수사 주요 경영진으로서 이수만 프로듀서의 회장 자리를 보장해줄 것’ ‘100억원 수준의 연봉을 지급할 것’ 등 조건들이 붙었다. 무엇보다 라이크기획의 존재가 컸다. 라이크기획은 프로듀싱 용역을 통해 SM 연간 영업이익의 최대 46%를 가져갔다. 요컨대 시장에서 말하는 ‘오너 리스크’가 경영 및 회사 진로의 악재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크기획과 SM의 조기 계약 종료가 시장에는 호재가 됐다.
SM-JYP-YG에 이은 SM-JYP-하이브의 신삼국지도 요동칠 것이다. ‘산업’과 ‘콘텐츠’의 관점이 아닌, 대중음악 애호가로서 이수만의 퇴장 예고는 한 시대의 일몰 전에 드리우는 노을처럼 보인다. 그가 걸어온 길은 단순히 아이돌, 또는 K팝 산업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가요계에 이수만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앨범은 1971년 발매된 양희은의 두 번째 앨범이다. 1952년생으로 그 해 서울대 농대 2학년이었던 그는 이 앨범에 코러스로 참여했다. 양희은은 앨범 커버 뒷면에 손으로 “이 판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는 감사의 말을 남겼다. 같은 해 이수만과 백순진이 결성했던 포크 듀오 사월과 오월의 데뷔 앨범도 있었지만, 이수만은 녹음만 하고 탈퇴했기에 앨범 커버에는 그의 얼굴이 없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이수만의 첫 음악 행보는 1970년대 포크였다. 당시 시점에서 가장 앞서 있던 장르이자, 한국의 첫 ‘청년문화’다. 1972년 6월 14일 명동 코리아나백화점 강당에서 열린 ‘맷돌’ 공연은 포크와 이수만의 관계를 말해준다. 이 공연은 한국의 아름다운 시와 청년들이 만든 멜로디를 결합하는 취지로 열린 행사다. 여기서 이수만은 김민기, 양병집, 양희은 등과 함께 참여해서 자작곡을 발표했다. 포크 싱어로서 그가 기억할 만한 히트곡을 남긴 건 아니지만, 1970년대 초반의 포크신에서 이수만이 제법 ‘인싸’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김민기는 1951년생, 양희은은 이수만과 동갑이다.
아직도 포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곧 록 밴드의 길을 걸었다. 친구들과 함께 ‘들개들’이란 팀에서 활동했으며 1980년에는 ‘이수만과 365일’의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산울림과 송골매의 시대에 이 밴드는 사이키델릭과 프로그레시브를 도입한 ‘진보적’ 사운드를 들려줬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MC를 비롯해, 방송계의 촉망받던 MC였음에도 대중적 취향에 맞추기보다는 본인의 음악적 욕망에 충실했던 이 앨범은 이후 이수만의 행보를 상징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유행에 맞추기보다 시대를 선도하려는 욕망의 길 말이다.
앨범 발매 다음 해인 1981년, 그는 유학을 떠난다. UCLA에서 아직 대중에게 이름조차 생소했던 컴퓨터 엔지니어링으로 석사를 따고 1985년 귀국, 1987년에 ‘New Age’라는 앨범을 낸다. 오랜 음악 팬에게는 라디오를 중심으로 소소하게 인기를 얻었던 ‘자화상’이 담긴 작품으로 기억될 테지만, 사실 이 앨범은 미디를 전면으로 내세운 국내 초유의 실험이었다. 미디는커녕 사람이 연주하는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다.
그는 1986년 인연을 맺은 국내 전자음악의 선구자 홍종화와 함께 새로운 사운드에 도전했고, 이때의 인연은 후일 홍종화가 SM의 첫 프로듀서로 영입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문세가 이영훈과 함께 한국 발라드의 새로운 문법을 구축하던 시절이었다. 낭만주의의 역사가 구축되던 그때, 이수만은 낭만의 지평선 너머에 있던 첨단을 바라봤다. 디지털 사운드의 광야에서 솟아날 초목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수만과 365일’ 때와 마찬가지로, ‘New Age’의 혁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수 이수만보다는 방송인 이수만을 대중은 선호했다. 2부작으로 발매된 ‘New Age’의 애매한 성과에 그는 제작자로 방향을 돌렸다. 라디오에서는 발라드가, TV에서는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 같은 댄스 가수들이 대세였다. 이수만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는 유학 시절 현장에서 목격한 마이클 잭슨-마돈나-바비 브라운으로 이어진 댄스 음악 혁명을 한국에 이식하고자 했다. 춤꾼이자 가수가 필요했다. 귀국 후 잠시 일하던 이태원 나이트클럽에서 인연을 맺은 DJ 출신의 최진열(후일 SM의 첫 매니저를 거쳐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매니저가 된다)을 통해 현진영을 소개받았다. 미8군 춤꾼들의 아지트였던 클럽 문나이트에서 그를 훈련시켰다. 강남과 이태원 춤판을 휩쓸던 두 친구, 강원래와 구준엽을 백댄서로 붙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최첨단 장비를 들여와 홍종화에게 프로듀싱을 맡겼다. 현진영과 와와는 그렇게 데뷔했다. 만약 현진영과 와와가 없었다면 이태원은 더 오랫동안 외국인 전용 구역으로 알려졌을 것이고 최진열은 이태원 DJ로 머문 채 잊혔을지 모른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신화 또한 다른 멀티버스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나비효과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다.
첨단 장비와 사운드에 대한 이수만의 집착을 알 수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있다. ‘슬픈 마네킹'이 담긴 현진영과 와와의 데뷔 앨범은 아날로그 릴 테이프에 녹음된 게 아니다. DAT(Digital Audio Tape), 하드 디스크 같은 21세기 디지털 녹음 기기에도 담기지 않았다. 일본 회사인 아타리가 내놨던 시스템에 녹음했다. 지금도 이 기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다. 세계적으로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LP 재발매가 붐인 요즘, 이 앨범이 재발매되지 못하는 이유다. 그만큼 새로운 것에 집착했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현진영은 마약에 손대면서 몰락했다. 그 후 이수만의 행보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모델로 ‘기획형 아이돌’을 구상했다. 그 결과 H.O.T.가 나왔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김광석의 죽음으로 공백이 된 1996년 최후의 승자는 ‘캔디’였고 H.O.T.로 인해 한국 음반 시장의 주역은 10대로 바뀌었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이수만은 아이돌에게 쏟아지는 부정적 시선을 변증법적 방법론으로 돌파했다. ‘노래를 못한다’ ‘애들만 좋아한다’ ‘국내용이다’ 등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해법을 내놓으며 마침내 K팝의 시대를 구축했다. 한국 아이돌의 계보와 역사의 기둥을 만들어 온 장본인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지금도 레드벨벳, 에스파 같은 손주뻘 그룹들이 이수만의 센스에 대해 ‘선생님’과 관련된 일화로 증언한다.
혁신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전부터, 그는 반세기 가까이 음악계를 혁신해왔다. 혹은 혁신이 일어나는 곳에 머물렀다. 영향력을 키워왔고 개인을 넘어 산업을 성장시켰다. 아니, ‘가요계’를 ‘음악산업’으로 바꾼 것도 이수만이었다. 주식 시장 참여자들이 SM의 오너 리스크 해소에 기뻐하던 날 나는 주변으로부터 왜 그런 정보를 활용하지 않았느냐고 타박을 들었다. 말없이 이수만의 50년을 떠올렸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기획 및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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