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위대한 수업' 제작진 "모시기 힘든 석학들이 이젠 '불러줘서 영광'이라네요"
폴 크루그먼, 마이클 샌델, 유발 하라리, 그레고리 맨큐…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세계적 석학들의 강연을 지난해 여름부터 안방에서 볼 수 있었다. EBS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 - 그레이트 마인즈> 덕분이었다.
고품격 방송이라는 시청자들의 호평과 함께 ‘한국 방송 역사상 최고의 라인업’이라는 수식을 얻은 <위대한 수업 - 그레이트 마인즈>가 지난달 시즌 2로 돌아왔다. 더 화려하고 한층 다채로운 라인업으로 돌아온 방송의 허성호 책임프로듀서(CP)와 송준섭·박진우·김대현 PD를 지난 22일 경기 일산 EBS 본사에서 만났다.
e메일 수십통에 현지 연구실 찾아 손편지로 읍소
폴 크루그먼·제인 구달 등 섭외…상업방송선 불가능
10년·20년 미래에 대한 답을 줘…시즌 3도 가야죠
“수신료 70원(수신료 2500원 중 EBS에 돌아가는 몫)만으로 절대 만들 수 없는 콘텐츠라고 생각합니다. 상업방송은 돈이 있더라도 만들 수 없는 방송일 테고요.”(허성호 CP)
지난해 8월 코로나19와 함께 점차 벌어지는 교육·지식 격차를 줄이기 위해 시작된 <위대한 수업>은 EBS가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K-MOOC) 운영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다.
20분짜리 고품격 강연이 전파를 타기까지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선 공부가 필요하다. 역사, 정치, 과학 등 PD와 작가들의 주력 분야를 정한 뒤 해당 분야에서 누가 가장 뛰어난 연구 실적을 내고 있는지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는 한국 학계의 도움이 컸다. “각 분야 전문가들을 통해 씨줄날줄 조사를 거치고 이분들의 조언을 방송 직전까지 받습니다. 교육방송과 한국 학자들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이런 프로그램은 나오기 어려웠을 거예요.”(허 CP)
화려한 라인업에서 짐작 가능하듯 섭외는 또 다른 산이다. 제작진은 수십, 수백 통의 e메일을 보내고 온갖 네트워크를 동원해 섭외를 시도했다. 작은 인연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허 CP의 은사인 구민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가 자신의 은사인 비놀드 아가왈 미 버클리대 교수를 소개시켜준 것이다. 15년 전 허 CP가 학생이던 시절 아가왈 교수의 한국 안내를 맡은 것이 인연이 됐다. 아가왈 교수가 학계 인사들에게 연락을 취해주었고 성공률은 100%였다. 조지프 나이, 폴 케네디 등이 그렇게 섭외됐다.
늘 쉽게 풀린 것은 아니다. 코로나19로 여러 제약이 있는 데다 석학들의 바쁜 스케줄과 까다로운 취향 등에 맞춰가며 촬영 일시와 장소 등을 잡아야 했다. 오죽하면 허 CP가 후배 PD들에게 “우리는 영업사원”이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수십통 메일을 보내는 것으로 모자라 현지 연구실을 찾아 손편지를 놓는 등 공을 들이고도 거절당한 경험이 숱하다. “촬영 전날 연락이 닿지 않아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 적”(김대현 PD)도 있다.
올해부터는 환율이 치솟으면서 실질 제작비가 줄어들었다. 허 CP는 “작년보다 PD들 출장일수를 절반 이하로 줄여 빠듯하게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2년째 방송을 만들고 있지만 회식 한 번 한 적이 없다. 일정이 바삐 돌아가는 데다 차례로 출장에 나서면서 한데 모이기 쉽지 않다. 인터뷰를 한 이날도 김민지 PD를 비롯한 다른 제작진은 촬영차 해외 체류 중이었다. <위대한 수업> 제작에는 총 9명의 PD가 참여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시즌 2 들어 섭외가 비교적 수월해졌다는 점이다. 석학들 사이에서 ‘(<위대한 수업>은) 좋은 프로그램이니 믿고 나가도 된다’는 입소문이 돌았다. “시즌 1 출연자 리스트를 보내면서 섭외 요청을 하면 ‘불러줘서 영광’이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박진우 PD)
그래서일까. 시즌 2의 분위기는 시즌 1 때와는 사뭇 다르다. 출연진 대부분이 중년의 백인 남성이라는 지적을 받은 첫 시즌과 달리 새 시즌에서는 연령이나 인종, 성별 면에서 다채로워졌다. 시즌 2의 첫 수업은 행동학자 제인 구달이 맡았다. ‘조 말론’ 향수로 유명한 조향사 조 말론이나 유명 셰프 피에르 가니에르처럼 보다 대중적인 인물들의 강연도 기다리고 있다. 허 CP는 “시즌 1에서는 국내에서 유명한 분들을 섭외하는 데 포커스를 맞췄다면 시즌 2에서는 국내 평가보다도 각 분야에서의 평판과 연구 실적 등에 집중했다”며 “시즌 1에서 섭외가 안 됐던 (백인 남성이 아닌) 강연자분들이 출연하면서 다양성도 확보했다”고 말했다.
이제 막 시즌 2가 시작됐을 뿐이지만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시즌 3에 대한 기대가 벌써부터 흘러나온다. 허 CP는 “콘텐츠의 질을 그대로 유지하며 시즌 2를 잘 넘기는 것이 지금 목표이고 그 외에는 여념이 없다”면서도 내부적으로 시즌 3 제작 의지가 확고하다고 귀띔했다. 송준섭 PD 또한 “국민 여러분의 성원이 계속돼야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이 영감을 얻는 존재는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인플루언서’라는 이름으로 팔로어들에게 메시지를 설파하고 상담도 해주는 시대다. 그럼에도 석학들의 ‘위대한 수업’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플루언서와 다른 TV 프로그램의 역할은 당장 오늘내일의 고민이 아닌 ‘10년, 20년 뒤 세상은 어떻게 될까’와 같은 큰 질문에 대한 답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런 미래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계속 효용이 있을 겁니다.”(송 PD)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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