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엔 점과 사주 그 이상의 것이 있다

한겨레 2022. 9. 2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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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
픽사베이

연재를 시작하며

주역(周易)을 전공한 필자는 대학에서 종종 ‘주역’과 관련한 강좌를 진행한다. 첫 시간에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주역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내용이 무엇인가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들을 이야기해 봅시다.” 쭈뼛쭈뼛 학생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점이요”, “사주요.” 어느 교실이나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대답들이다. 뒤이어 “음양이요”, “오행이요”, “그 뭐더라, ‘괘’인가?” 이런 대답이 나오는 교실도 가끔은 있다. 이렇게 시작한 수업이 어느덧 기말을 향해 갈 때면 학생들은 마치 ‘하늘을 나는 용’이라도 된 것 같다. 태극기의 원리와 철학 정신을 논하고, 훈민정음의 역학적 원리 및 그 인간학적 의미를 토론한다. 그 성장 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역’을 이야기하는 이 공간의 문패를 ‘나를 찾아가는 주역’이라 하였다. 이 구석방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나름대로 쓸모 있는 도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나의 정체성은 내가 속한 역사 공동체와의 깊은 연관 속에서 형성된다는 생각으로 서술 방향을 기획하였다. 따라서 이 코너의 취지는 <주역> 책의 내용을 풀어쓰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한국인의 사상과 생활문화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역(易)의 사유 방식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왔는가를 하나씩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잘 들여다보면 역의 사유 방식은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한국인의 마음 씀을 통해 그 독특한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늘 누리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던 숨은 보석과 같다. 예를 들어 태극기와 훈민정음이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이라는 점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역의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의 사유를 특징짓는 말로는 관계, 상생, 평화, 생명, 중도, 균형, 주체, 창의 등을 들 수 있겠다. 수천년을 지탱해온 한국의 끈덕진 저력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앞으로 한 회 차씩 한국문화의 구체적 소재를 통해 그 문들을 열어 보고자 한다. 그 터를 닦기 위해 먼저 역의 사고 방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주역(周易)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첫째는 ‘두루 통하는 역’이고, 둘째는 ‘주나라의 역’이란 뜻이다. ‘역’은 주나라 역이 전부가 아니다. 주나라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는 ‘귀장역(歸藏易)’이 있었고, 그보다 앞서 하나라에는 ‘연산역(連山易)’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약 150년 전 충남 연산 지역에서 일부(一夫) 김항(金恒)이 창도한 ‘정역(正易)’이 출현하였다. ‘주역’이 주나라 역이라고 해서 특정 민족이 만들어낸 특정한 시대의 산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주역’의 다른 뜻이 ‘두루 통하는 역’이듯이, 그것은 수천년 동안 동아시아 사유의 근간을 이루어온 보편적 사유체계이자 문헌이다. 기독교의 성경이나 불교의 여러 경전이 특정 국가나 특정 민족의 전유물로 귀속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코너에서 사용하는 ‘주역’이란 용어는 그러한 의미이다. 그러면 ‘주역’이든 ‘정역’이든, 그 공통 분모인 ‘역’의 사유란 무엇인가?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 역은 ‘변화’이다

역(易)이란 글자의 뜻은 ‘바뀌다’이다.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보통 역(易)이라는 글자는 ‘일(日)+월(月)’의 합성 자라 하기도 하고, 도마뱀을 그린 상형문자로 보기도 한다. 해와 달, 밤과 낮, 불과 물이 세상이 변화하게 되는 중심축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다. 또 도마뱀은 시시각각 그가 처한 상황에 알맞게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생명을 보존하는 특징을 지닌다.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때와 장소에 가장 알맞게 처신한다는 ‘시중(時中)’의 관념이 소박하게 들어있다. 이러한 문자적 기원은 모두 역이 ‘변화’를 중시함을 보여준다. 즉 세상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며 순간순간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감으로써 영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역(易)의 기본관점이다.

역은 ‘관계’이다

이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면, 그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변화에는 상반된 두 힘의 작용이 숨어 있다. 밤과 낮이 교차하여 하루가 이루어지고, 추위와 더위가 한 차례씩 지나가 한 해가 된다. 여자와 남자, 올라감과 내려감, 딱딱함과 부드러움 등 이 세상은 대립자, 즉 음과 양의 상호작용으로 가득 차 끝없이 생명의 변화를 거듭해 나간다.

음과 양은 서로 안겨 자란다.

음과 양은 서로 안겨 자란다. 삽화 이선녕 제공

양(陽)과 음(陰)의 문자적 풀이는 산기슭에 비추는 빛과 그늘이다. 빛이 있다는 것은 저편에 반드시 그늘이 있음을 함축하며, 그늘은 빛과 대립하지만 그 존재는 빛과 떨어질 수 없다. 이와 같이 어떤 존재자의 성립은 그 상반자의 존재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 서로 반대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것이 음양의 관계방식이다. 이를 상반상생(相反相生)이라 한다. 음양의 대립적 쌍들은 끝까지 제 고집을 부리며 평행선을 달리지 않는다. 서로 반대편에서 마주 보고 있지만 만나기를 기다린다. 우리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다. 미운 사람에게 오히려 떡을 하나 더 준다는 이 재미있는 역설적 발상에는 이미 함께 상생해 가는 역학적 지혜가 스며있는 것이 아닐까?

초복·중복·말복의 삼복(三伏) 더위란 여름 더위의 절정을 일컫는 말이다. 문자대로라면 세 번 엎드린다는 것인데 무엇이 엎드린다는 말인가? 복(伏)이라는 글자를 보고, “개가 납작 엎드린다는 말이냐?”고 반문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더위의 절정에 이미 겨울 기운이 와서 엎드려 있다고 풀이한다. 실제로 말복이 지나면 더위는 얼마 가지 않아 그 위세를 떨구며, 겨울 기운은 허리를 펴고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무엇인가 극성을 부리거나, 맹위를 떨친다는 것은 곧 그러한 현상이 바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를 ‘극한에 이르면 반대편으로 되돌이킨다(極則反)’라는 말로 표현한다. 초승달은 자라나기 마련이며 보름달은 꺼져 들기 마련이다. 음의 기운이 자라나면 양의 기운은 그만큼 줄어들고, 양의 기운이 불어나면 음의 기운은 그만큼 물러난다. 이러한 음양의 관계를 소식(消息)이라고 한다. 소(消)는 줄어든다는 뜻이고 식(息)은 불어난다는 뜻이다. 우리가 “요즘 아무개가 왜 소식이 없지?”라고 할 때, 이 ‘소식’은 음양의 밀고 당김에 의한 세월의 흐름과 변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생 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반전의 반전, 화와 복, 슬픔과 기쁨, 얻고 잃음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라는 삶의 지혜에도 주역의 사유가 녹아있다.

역은 ‘생명살림’이다

음양에 의한 변화는 자연의 생명 변화를 지칭한다. 세계는 내 몸의 세포와 같은 미세한 단위로부터 하늘과 땅이라는 거대한 단위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변화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말이다.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주역>에서는 “생명 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남을 역이라 한다(生生之謂易)”라든가,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天地之大德曰生)”라고 한다. 왜 하늘과 땅을 말하는가? 하늘과 땅은 음양의 대표적 상징으로서 세계가 생성 변화하는 중심축이 되기 때문이다. 하늘은 생명의 시초가 되고, 땅의 작용에 의해 생명은 구체적으로 완성된다고 본다. <주역>이란 책을 열면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乾卦䷀)’와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卦䷁)’를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이 두 괘에서 특히 건괘는 우주적 생명 작용의 원리와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기대를 품고 책을 펼쳤을 때 처음 만나는 건괘에는 달랑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쓰여 있다. 다음 괘인 곤괘도 별 다름없이 ‘원형이빈마지정(元亨利牝馬之貞)’이라 쓰여 있다. ‘빈마’는 암컷 말이란 뜻이다. ‘암컷 말’을 덧붙여 곤괘가 여성성을 지닌다는 의미를 추가했을 뿐, 두 괘는 ‘원형이정’이라는 암호 같은 문구로 보는 이를 당황케 한다. 현대의 우리에게 낯설기만 한 이 ‘원형이정’이란 말은 필자의 할머니 세대에게는 일상용어였다. 할머니는 “그것참, 일이 원형이정으로 되었구먼”이라고 하시곤 했다. 그것은 그 일이 법도에 어긋남 없이 순리에 맞고 자연스럽게 잘 되었다는 뜻이었다. 즉 원형이정은 자연의 순리를 뜻하는 말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원형이정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특성을 요약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봄은 으뜸 원(元)로 상징된다. <주역>에는 원(元)이 ‘모든 선의 으뜸(善之長也)’이라고 쓰여 있다. 봄이 왜 선한 것 가운데서도 또 으뜸인가? 봄은 만물을 차별 없이 살리는 커다란 생명 살림의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주역>은 그러한 마음을 ‘인(仁)’이라고 말한다. ‘원(元)’과 ‘인(仁)’은 그 내용이 같다. 그래서 ‘만물을 낳고 살리는 하늘과 땅의 마음(仁)을 체득해야 윗사람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다’(건괘, ‘문언전’)고 말한다. 또 식물의 씨앗을 인(仁)이라고 한다.

씨앗은 생명의 핵(仁)이다

복숭아씨를 도인(桃仁)이라 하고, 살구씨를 행인(杏仁)이라 한다. ‘씨앗’은 생명의 핵이다. 그런가 하면 몸이 마비된 것을 ‘불인(不仁)하다’라 표현하기도 한다. 생명의 기운이 막혀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仁)이란 단지 사람들 사이에서 권장되는 윤리적 덕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뭇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유교에서 ‘인이란 사람다움이다(仁者人也)’라고 하는데, 이를 다시 읽으면 사람다운 사람은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너와 내가 잘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씨앗은 생명의 핵이다. 그림 이선녕 제공

내친김에 형・이・정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보자. 여름은 형(亨)과 예(禮)로 그 특징을 표현한다. ‘형’은 형통함이고, ‘예’는 ‘아름다움의 모임’이라는 것이 <주역>의 설명이다. 봄에 소생한 여린 생명은 여름을 맞아 아름답고 싱싱하게 성장한다. 우리가 ‘예’를 갖추기 위해 나름대로 다듬고 꾸미듯, ‘예’는 꾸밈 그리고 아름다움과 상통한다. 가을은 이로움(利)과 의로움(義)의 계절이다.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지만 한편으로 거둘 것과 버릴 것을 가르는 심판의 계절이며, 수확한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야 하는 정의(正義)가 요청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주역은 이(利)에 대하여 '의로움과 조화를 이룬다'라는 해설을 추가하고 있다. ‘이로움’과 ‘의로움’의 균형과 조화는 가을의 과제이다. 겨울의 특징은 ‘곧고 단단하다’는 의미의 정고(貞固)로 표현된다. 겨울을 맞아 나무들은 그 생명의 기운을 땅속으로 끌어내려 굳게 지킨다. 다시 돌아올 봄을 준비하며 단단하게 버티는 겨울의 덕성에 대해 <주역>은 ‘일의 근간이다’라는 해설을 붙이고 있다.

이와 같이 <주역>은 하늘과 땅을 내세워 사계절을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와 생명 작용을 원형이정으로 설명하고, 그로부터 자연을 닮은 인간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상반된 힘의 상호작용을 통한 생명 살림의 길이다.

천지인 삼재의 인간론: 세계와 소통하는 주체

하늘-땅-사람

하늘-땅-사람. 삽화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주역의 인간론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로 요약된다. 삼재론은 우주에서 인간의 위상을 말하는 인간존엄사상을 담고 있다. 얼른 보면 이론이라기에는 참 단순하고 소박하다. 우주의 세 기둥이 하늘·땅·사람이라는 말이다. 천지인 삼재의 인간론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늘과 땅의 소산인 인간, 그러나 하늘 땅과 대등한 인간’이다. 역의 관점에서 이 세계의 존재자들은 돌멩이 하나까지도 모두 다 하늘과 땅이라는 부모에게서 나왔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그 외 존재자들과 천지 부모의 기운을 나누어 받은 ‘동기간(同氣間)’이다. 형제자매의 사이를 칭하는 ‘동기간’이라는 말은 어느새 잘 쓰지 않는 낯선 용어가 되어 버렸지만, 어릴 적 “동기간에 사이좋게 지내야지”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종종 듣곤 했다. ‘동기간(同氣間)’의 글자를 살펴보면 ‘(부모의) 기운을 한가지로 지니고 있는 사이’라는 뜻이니, 나와 우주의 모든 존재자는 가깝고 먼 차이는 있어도 서로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된 생명이다. 그러니 천지인 삼재로서의 인간은 하늘과 땅을 향해 열려있는 존엄한 존재이지만 저 홀로 잘난 독불장군이 아니다. 우주적 연대의식 속에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주체가 바로 역(易)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음양관계론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원리 규정이라면, 천지인 삼재론은 인간이 하늘 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라는 존엄성과 주체성의 자각을 촉구하는 사상이다. 이와 같은 음양(오행) 및 천지인 삼재사상은 한국전통문화의 기저를 이루며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된다. 끊임없이 역동적 평형을 찾아 나가는 ‘다이내믹 코리아’의 모습도 이 문화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겠다. 다음에는 개천절을 즈음하여, 단군신화의 구조와 홍익인간의 이념이 역의 사유를 어떤 모습으로 구현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려 한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 차기 주역학회장)

성균관대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거쳐 대만국립정치대학에서 주역을 연구한 뒤 한국주역대전 편찬팀장을 지내고, 차기 주역학회장에 선임된 상태다. 개벽사상의 주창자인 정역 연구의 1인자인 학산 이정호 전 충남대 총장이 할아버지고, 이동준,류승국 등 여러 동양철학자를 배출한 동양학 집안이다. 67sunflower@naver.com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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