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일터는 안전하지 않다".. 상사·동료·고객 가리지 않는 젠더폭력

김수진(오른쪽 두 번째) 언론노조 성평등위원장이 26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열린 '젠더폭력 없는 안전한 일터 위한 여성노동자 실태 보고 및 종합대책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충격파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수많은 여성들이 일터에서 젠더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차별적 고용 관행 개선 등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민주노총은 26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직장 내 만연한 젠더폭력 실태를 고발했다. 젠더폭력은 특정 성별이나 성적 지향성 때문에 당하는 괴롭힘·갑질 등의 폭력을 의미하는데, 여성폭력이 우리 사회에 가장 만연한 젠더폭력의 형태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겪은 젠더폭력 피해 사례 증언이 이어졌다.

일하면서 듣는 성희롱·추행·폭언... "성차별적 고용 관행 없애야"

26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젠더폭력 없는 안전한 일터 위한 여성노동자 실태 보고 및 종합대책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 비율이 높은 가정방문 노동자들은 고객의 집에서 직접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거나, 끊임없는 사적 연락으로 고통받았다. LG 렌털가전을 관리하는 매니저들로 구성된 LG케어솔루션의 김정원 지회장은 "속옷 차림으로 문을 열어주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거나, 등 뒤에서 스킨십을 하고 성적인 농담을 하는 고객들이 있다"면서 "방문 일정을 잡으려 연락하면 술 한잔 하자거나, 사귀자는 문자를 수십 차례 보내는 고객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신상 정보가 공개된 여성기자들은 독자들로부터 온라인 댓글로 외모 품평, 조리돌림 등을 당하기도 하고, 오프라인에서까지 위협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김수진 언론노조 성평등위원장은 "여성기자에게는 남성기자와 다른 양상의 악성댓글이 달리는데 외모 품평, 욕설, 성희롱, 심지어는 강간 협박까지 한다"면서 "정신적 트라우마는 기본이고 장기간 노출되면 직업적 효능감이 떨어져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직업을 포기하기도 해, 젊은 여성기자 이직률이 높다"고 지적했다.

직장 내에서 직원과 고객을 상대로 젠더폭력을 일삼는 경우도 있었다. 코레일의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 직원 A씨는 "여직원과 승객을 상대로 '쟤는 남자들이 먹으면 맛이 없게 생겼다' '쟤는 너무 말라 뼈끼리 부딪혀 아플 것'이라는 등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던 KTX 셔틀버스 운행팀장이 있었다"면서 "역무실에 있는 업무용 컴퓨터로 근무시간 중 여성 속옷 검색, 포르노 시청 등을 해온 역장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여성 역무원들과 일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민주노총은 여성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직장 내 젠더폭력이 고질적인 성차별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했다. 박희은 민주노총 여성위원장은 "여성들을 성적대상화하고 사유화하려는 여성혐오 문화로 인해 일터 내 젠더폭력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라며 "전반적인 조직문화를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서울교통공사와 고용노동부는 신당역 살인사건을 산재사망사로 인정하고, 성폭력이 사회의 안전과 일터의 안전을 해치는 중대재해임을 사회적으로 공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지혜 기자 5g@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