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기사에는 '고인'이 없다?

윤수현 기자 2022. 9. 2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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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유명인 아니면 직함 없이 이름만…핵심은 유가족
직업 편향성 발견… 기업인·언론인·학계·공무원 위주

[미디어오늘 윤수현 기자]

조선일보의 부고기사가 고인이 아닌 유가족 중심이며, 특정 직업이 주로 언급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조선일보 부고기사 다수는 기업인·언론인과 관련이 있었다. 이 같은 경향은 비단 조선일보만의 특징은 아니다. 부고기사의 개방성을 높여 일반 독자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순찬 조선일보 기자, 김영욱·정재민 카이스트 교수는 지난달 한국언론정보학보에 '한국 신문의 단신 부고 제작 관행과 부고 내용분석' 논문을 게재했다. 저자들은 2020년 1월1일부터 6월30일까지 조선일보에 게재된 단신 부고기사 939건, 지난해 8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 조선일보에 접수된 부고기사 의뢰 경로를 분석했다.

▲9월23일자 조선일보 부고기사 갈무리. 고인의 생전 직함을 적은 경우는 1건에 불과하다. 유가족이 언론인, 스포츠인, 법조인, 기업인일 경우 직함을 적었다.

부고기사에서 '고인'의 정보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인의 이력을 게재한 부고기사는 24.4%에 불과했다. 논문은 “(고인이) 퇴직한 상태여서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거나, 언론사 부고에 까지 내세울 만한 직업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등 여러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했다. 고인 성별은 남성 56.8%, 여성 43.2%다. 이는 통계청 사망자 통계(남성 54.2%, 여성 45.8%)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부고기사가 유가족 중심이기 때문에 고인 성별 비율이 균일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논문은 “만약 고인의 직함에 따라 부고를 선별해 실었다면 유명인의 부고처럼 일반인 부고에서도 남성의 비중이 높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과거에는 고인의 이름을 적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한겨레·경향신문을 제외한 대다수 신문은 2013년까지 고인에게 직함이 없으면 이름을 싣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2014년 1월 지면에 알림 기사를 내고 “지금까지는 돌아가신 분이 생전 주요 직위를 가졌던 경우만 성명을 썼다. 앞으로는 모든 부음이 고인의 이름으로 시작된다”고 했다. 현재는 다른 신문사도 고인의 이름을 적고 있다.

고인·유가족의 직업에선 편향성이 발견됐다. 고인의 직업군은 기업 대표·임원(22.7%), 언론계(10.9%), 학계(10.5%), 시민단체·협회(9.6%), 공무원·공기업·군경(9.2%), 교육계(7.4%), 문화·예술·종교계(7.4%) 순이다. 유가족 직업군은 기업 대표·임원(27.2%), 기업체 직원(16.6%), 언론계(15.5%), 공무원·공기업·군경(10.0%) 순이다.

▲'한국 신문의 단신 부고 제작 관행과 부고 내용분석' 논문 중 고인, 유가족 직업군 통계 자료

논문은 기업 관계자 직업군 비율이 높은 것에 대해 “기업체 홍보팀 등에서 사내 임원 이상 인사의 상이 있을 경우 적극적으로 부고 게재를 언론사에 요청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논문은 언론계 종사자의 비율이 높다면서 “국내 경제활동 인구의 0.2%에 해당하는 (언론) 직군이 부고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업계 종사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소속 매체와 무관하게 선후배 문화로 뭉쳐진 기자 업계에서 누군가의 상이 있으면 서로의 매체에 부고를 부탁하고, 이를 관대하게 실어주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부고기사에 기록된 장례식장을 분석한 결과 10회 이상 언급된 곳은 모두 수도권에 위치한 대형 대학병원이었다. 이들 병원과 관련된 부고기사는 전체의 40.7%다. 논문은 “해당 병원은 신문 부고를 장례서비스의 일환으로 유족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이용하지 않는 일반인이 언론사 팩스 번호를 알아내 부고 의뢰 양식에 맞춰 게재를 신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신문 부고는 대학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살면서, 이를 이용할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이 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했다.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의 부고 접수 과정을 살펴본 결과 '연합뉴스'가 37.5%로 가장 높았다. 부고 담당 기자가 연합뉴스에 올라온 부고기사를 모니터링한 후 지면에 실을 소식을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사내 요청'이 35.0%로 두 번째로 높았다.

논문은 “부고 게재를 요청하는 이는 말단 기자부터 국장급, 논설위원급까지 다양하다”며 “지인 혹은 출입처에서 전달받은 부고 게재 요청을 전달하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결론적으로 일반 독자가 조선일보에 직접 부고를 의뢰한다는 것은 쉽지 않고, 실제로 그 숫자가 많지 않다”며 “신문사들이 사실상 유사한 부고 접수 및 제작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경향을 나타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연합뉴스 부고기사가 나가면 신문에서도 기사가 게재될 확률이 높지만, 진입장벽이 있었다. 논문에 따르면 연합뉴스는 고인·유가족이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부고기사를 게재한다. 논문은 “연합뉴스는 개방적인 접수 경로를 가졌지만 자체 기준을 통해 별다른 직함·직업이 없는 평범한 시민의 부고는 게이트키핑 과정에서 누락시킨다”고 지적했다.

논문이 일반인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94.7%는 부고기사 이용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고인·유족이 유명 인사가 아니라서'라는 답이 35.5%로 가장 높았다. 독자들이 부고기사에 진입장벽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부고의 필요성을 느끼는 비율도 낮았다. 뒤이어 '부고에 실리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서'(24.2%), '나 스스로 알려도 충분해서'(20.6%) 순으로 답변이 많았다.

▲영국 가디언의 부고기사 모음. 유가족이 아닌 고인이 중심이 된 기사들이다.

가디언·뉴욕타임스 부고기사는 대부분 당사자를 중심에 놓고 있다. '아무개씨의 부친상·모친상'과 같은 부고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인의 직업은 언론인, 예술가, 군인, 스포츠인 등 다양하다. 이들 언론은 기사에서 단순 장례 정보 대신 고인의 삶과 업적 등을 조명했다.

신혜정 조선대 교수는 2014년 '빈도 분석을 활용한 한·영 사망기사 특징 비교' 논문에서 “영미권에서 사망기사는 단순한 사망 고지를 넘어선 삶의 평가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인의 전기로, 족립된 글쓰기 장르로 인식된다”고 설명했다.

한국도 부고기사 양식을 바꾸고, 독자 개방성을 높이면 어떨까. 논문은 “2020년 국내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서는 데드크로스가 처음 발생했다”며 “세상을 떠나는 보통 사람들의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언론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제대로 추모하고 남은 자들이 교훈과 감동을 얻을 수 있는 '부고면'을 신설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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