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 40주년을 맞아 한국 프로야구가 다시 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여자 야구선수는 40년이 지난 오늘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스포츠서울은 한국 여자야구의 현주소를 알아보고 가야할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스포츠서울 | 고양=황혜정기자] “기자님~ 마트 글러브 사지 마시라니까요.”
감독 김지혜(36)씨가 기자가 사온 2만5천원 짜리 아동용 글러브를 보더니 한 말이다.
대신 어딘가 ‘있어 보이는’ 글러브를 꺼내 빌려준다. ‘탁’ 글러브에 공이 꽂힌다. 공이 날아와 손바닥에 맞는 감촉이 아프지 않고 시원하다. 일제 글러브인데 소가죽으로 만들어 30만원이 훌쩍 넘는단다. 오랜 시간 가죽이 길든 탓도 있지만 확실히 마트에서 파는 글러브와 느낌이 다르다. 손에 착 감기는 맛이 비싼 값을 한다.
이날 기자가 방문해 야구 체험을 한 곳은 한 여성 사회인 야구 동호회다. 부원 30여명은 매주 월요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야구장에 모여 야구 연습을 한다.
간단하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뒤, 캐치볼을 하며 연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날 기자와 캐치볼을 주고 받은 장유리(40)씨는 사회인 야구 경력 1년 차 부원이다. 현업은 모델 출신 무대 연출 감독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야구 초보예요”라며 동작 하나 하나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돌려보는 열정을 보였다.
몇 번 해보니 캐치볼에 자신감이 생겼다. 왕초보 기자를 위해 거리를 좁혀 캐치볼을 던져주던 유리 씨는 모델답게 키가 훤칠하다. 이따금 높이 던져주자 기자는 높이 뛰어올라 글러브에 공을 잡아냈다. 공이 안 잡힐 듯 했는데 글러브가 손보다 커 ‘탁’하고 잡히자 쾌감이 느껴졌다. 유리 씨가 엄지를 치켜세워주며 조언을 해줬다. “날아 다니시는걸요? 대신 공을 던질 때 손에 힘을 조금만 더 쥐어 보세요!”
캐치볼 연습을 마치고 생애 처음 타석에 선 기자. 야구 배트도 생전 처음으로 들었다. 프로야구장 기자실에서 봐왔던 것처럼 야구 선수들처럼 뒷발로 탁탁, 배트로 탁탁 괜스레 타석을 두드려 본다. 배트는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괜스레 설렜다. ‘나는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다’를 마음 속에서 3번 외쳤다.
홈런은 못 쳐도 2루타를 치고 말겠다는 의욕과 달리 ‘휭’하는 힘없는 스윙과 함께 무게 중심을 잃고 말았다. 당황했지만 조언에 따라 배트를 조금 더 짧게 잡고 다시 힘차게 휘둘렀다.
기자는 허무하게도 이날 나선 모든 타석에서 헛스윙을 연발했다. 공을 보고 배트를 힘차게 휘둘렀는데 계속 헛스윙만 반복했다. 코치로부터 ‘기다렸다가 공을 끝까지 보고 치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배트를 휘두르는 순간 공이 사라져 있었다.
보다못한 부원들 모두가 기자에게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쳐줬다. “생각보다 어렵네요”라며 혀를 내두른 기자에게 12년 차 야구 경력의 지혜 씨는 “배트로 공을 치는 건 방법을 조금만 알면 쉬워요. 정확히 공을 던지는게 가장 어려워요”라고 말했다.
이어 수비 연습을 했다. 이날 1루 수비를 보던 야구 경력 6개월 차 김이레(36)씨는 프로야구 관련 영상을 올리는 구독자 3만 명을 보유한 유튜버다. 그는 “야구를 보는게 직업이여서 왜 선수들이 실수를 하는 걸까 고민하다가 직접 해보면 어떤 느낌일까 해서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2루와 3루 사이에 공이 날라오자 유격수를 맡은 지혜 씨가 공을 재빨리 잡아 1루수 이레 씨에게 송구한다. 이레 씨는 안정적으로 공을 잡은 뒤 베이스를 밟아 주자를 아웃 시켰다. “나이스!” 부원들이 박수를 쳐준다. 이레 씨 입가에 웃음꽃이 핀다.
누군가가 타석에 들어서자 모두들 “뒤로 물러나”를 외쳤다. 직감적으로 강타자라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기자와 다르게 헛스윙 한 번 없이 모든 공을 외야로 멀리 보낸 이다희(34)씨는 테니스 선수 출신이다. 야구 경력은 3년이지만 2022년 여자 야구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지낸 실력자다. 다희 씨는 “보는 건 쉬웠는데 처음에 나도 야구를 시작할 때는 어렵더라”며 “테니스와 다르게 야구는 단체 스포츠의 매력이 있다”며 미소지었다.
기자에게 2루 수비 위치를 알려주던 경력 3개월 차 최형민(29)씨는 “야구는 팀 스포츠라 함께 땀을 흘리면서 하니 시간이 잘 간다. 함께 할 수 있어서 재밌다”고 말했다. 형민 씨는 이날 2루 수비 연습을 한창 하느라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쉴새 없이 공을 쫓아다니고 1루와 3루로 송구했다.
수비 연습이 계속 이어졌다. 이들은 높이 뜨거나 굴러오는 공을 잡고 정확하게 던지는 연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끊임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1, 2루 중간 즈음 어정쩡하게 자리잡고 있는 기자 쪽으로 높이 뜬 타구가 날아왔다.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화려한 슈퍼캐치부터 프로야구 선수들도 가끔하는 중요한 순간 실책까지. 생각이 많았던 탓일까, 공이 글러브를 맞고 땅으로 뚝 떨어졌다. “아이쿠” 아쉬움에 탄식이 나왔다. 캐치볼과는 또 달랐다.
“그래도 공을 안 무서워하시네요”라며 부원들이 격려를 건넸다. 이날 외야 수비를 맡은 부원들은 높은 타구가 날라오자 안정적으로 잡기도, 타구 방향 예측을 잘못해 열심히 공을 쫓아 뛰어다니기도 했다.
외국인 부원들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에서 온 안젤리카(27)씨와 케냐에서 온 제인(32)씨다. 안젤리카 씨는 아직 한국말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운동신경도 좋고 열정이 넘친다. 감독 지혜 씨는 “안젤리카가 배우려는 자세가 좋다. 힘도 굉장히 좋은 편”이라고 칭찬했다.
안젤리카가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 제인 씨가 달려간다. 제인 씨는 한국에 온지 13년이 돼 안젤리카와 한국인 부원들의 소통창구가 되어준다. 지혜 씨는 “제인이 한국말을 잘해서 팀원들과도 잘 어울린다. 모두 열정이 넘치는 친구들”이라며 미소지었다.
어느덧 3시간의 연습시간이 끝났다. 그런데 강은미(34)씨가 연습이 종료된 후 투구판을 밟고 마운드에 올라섰다. 야구 경력 6개월 차인 그는 투수 연습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은미 씨는 특전사 출신이다. 그는 “특전사로 8년 동안 복무를 하고 전역을 했는데 특전사 훈련 중에 무성무기 기술이라고 있다. 칼이나 젓가락을 던지는 기술이다. 이 기술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야구공도 정확히 잘 던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투수에 지원했다”라며 미소지었다.
그러나 이날 제구가 잘 되지 않았던 은미 씨는 “허허. 오늘은 잘 안 되네. 다음에 다시 해볼게요”라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2년 간 야구를 직접 해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형민 씨는 “일에 지치고 힘들다면 야구를 해 보는 것도 기분전환에 큰 도움이 되는 같다. 팀으로 야구하면서 같이 뛰고 응원하고 웃으면서 운동하니 야구 안 하는 날에도 삶에 활력이 달라진다”고 역설했다.
이레 씨는 “무엇인가에 도전하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새로운 스포츠를 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무엇보다 유니폼이 예쁘다는 점이 장점인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팀의 감독이자 4살 아들을 키우고 있는 지혜 씨는 “야구 규칙을 몰라도 여성 사회인 야구 동호회에 들어올 수 있다.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도전해보시라. 직접 야구를 해보면 보는 것보다 훨씬 재밌다.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안타를 치고 살아서 베이스를 밟으면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구나’ 싶다. 또 수비같은 경우, 타구를 잡고 아웃 시킬 때 훈련했던 보람을 느낀다. 그 희열에 ‘아 이게 야구구나’ 한다”며 미소지었다.
유리 씨는 “야구는 끈끈한 의지와 믿음이 있는 스포츠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무너지더라도 작은 힘을 가지고 서로 의지하며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운동이다. 나이와 경력에 상관없이 여자 사회인 야구는 끈기와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처음에는 공도 많이 맞고 멍도 들었다. 그런데 부원들과 합을 맞춰가며 움직이는 게 정말 재밌더라. 1년 간 야구를 하며 호흡과 근력이 많이 늘었다. 야구는 알고 보면 쉽고 재밌는 운동”이라며 활짝 웃었다.
141g밖에 안 되는 작은 공 하나에 울고 웃으며 하나되는 기쁨을 느낀 이들은 알 수 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함께 야구를 할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