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자 '엘' 또 놓쳤다, 해킹으로 잡을 수 있다면?

한겨레 2022. 9. 2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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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보도 그후][한겨레21] 프로젝트 '너머n'
수사기관이 범죄자의 디지털 정보에 접근하는 '온라인 수색'
기본권 침해 우려 있지만 범죄피해 막기 위해 도입 논의 필요

게티이미지뱅크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텔레그램을 기반으로 한 아동·청소년 대상의 디지털 성착취·성폭력 사건은 진행형이다. 이번에는 ‘엘’이다. SNS를 이용해 대상을 물색하고 유인(조력자 등으로 가장)한 뒤 성착취물을 제작한 범죄자 엘을 추적해야 하는 한국 수사기관은 또 한발 늦었다. 증거를 수집한 피해자가 2022년 1월 경기도 파주경찰서에 신고했으나, 성착취물 유포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문성이 떨어지는 여성청소년과에서 사건을 맡았고 수사는 8개월째 제자리걸음이었다. 페이스북 등에 수사 협조를 요청했으나 확인한 IP는 유동이었고 그나마도 기록이 지워진 상태였으며 텔레그램은 공조가 안 됐다. 그러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뒤에야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가 8월31일부터 전담수사팀을 구성해 엘을 쫓고 있다.

 n번방 이후 ‘엘’ 등장에 또 늑장 대응

‘n번방’과 ‘박사방’ 등을 수사한 경험이 있는 수사기관은 왜 또 이렇게 늑장 대응을 하는 것일까? 문제의 원인은 다양하다. 오프라인 수색에 기반한 낡은 수사 기법, 국제공조를 위한 조약 가입 등을 미루는 정부, 졸속으로 만들어진 누더기 법안으로 생긴 공백, 디지털성범죄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원, ‘수요’와 ‘공급’이 끊임없는 착취·폭력 구조에 대한 반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26만 명’의 디지털성범죄자, 그리고 여전히 잡히지 않은 일당들. 이런 환경에서 ‘엘’은 언제든지 나올 수 있었다.

낡은 수사기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온라인 수색’을 알아보려 한다. 디지털성범죄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국경 등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는 범죄다. 익명성과 암호화 등을 기반으로 폐쇄적이고 은밀하게 시작하기 때문에 적발이 어렵고, 범행을 인지하거나 사후 추적하려는 시점에는 이미 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기존 오프라인 범죄와는 접근을 달리해야 한다. 이런 특성을 고려해 한국은 일명 ‘n번방 방지법’이라는 입법적 보완을 시도했고, ‘위장수사’라는 제한된 형태의 잠입수사를 도입했다.

그러나 n번방 방지법은 개정 당시부터 실제 성착취가 발생하는 텔레그램을 막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사적 대화방’으로 규정되는 텔레그램은 n번방 방지법 중 개정된 정보통신망법 등의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제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이 n번방, 박사방 관련 수사·재판이 진행 중인데도 성착취 범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입법적 공백과도 연관이 있다.

위장수사의 경우 수사관이 정체를 밝히지 않고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할 수 있지만 현행 형사사법 절차에 비춰 불법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2021년 9월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으로 위장수사(제한된 형태의 잠입수사)는 일부 가능해졌다. 이 제한된 잠입수사는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온라인 그루밍’ 등 성착취·성폭력을 저지르려는 범죄자를 대상으로 수사관이 신분을 속여 접근한 뒤 기회를 제공해 범죄자가 범행하는 구조로 돼 있다. 문제는 범죄자와의 연락이 끊기거나 범죄자가 범죄를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수사를 진행할 수 없다. 이런 한계를 일정 부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온라인 수색’이다. 범죄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수사기관이 비밀리에 범죄자가 관리하는 정보기술시스템에 접근해 수사를 진행하는 수사기법이다.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2021년 10월1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성착취 영상물 배포 혐의로 징역 42년형이 확정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을 규탄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66개국이 ‘온라인 수색’ 적극 검토하는데

온라인 수색은 디지털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형사절차상 수색 과정으로, 유체물 형태의 압수물을 획득하려는 ‘오프라인 수색’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오프라인 수색이 대상자의 컴퓨터를 중심으로 컴퓨터 내부 및 연결된 외부 서버에 저장된 정보를 찾는 것이라면, 온라인 수색은 수사기관(국가기관)이 자신의 컴퓨터로 대상자의 정보기술시스템(컴퓨터, 휴대전화 등)에 저장된 정보(범죄 정보, 위치 정보 등)에 몰래 접근하는 것이다.

세계 각국은 공조를 위한 조약 가입과 온라인 수색 제도 등의 도입에 적극적이다. 2004년 발효된 ‘EU사이버범죄방지조약’은 원격지 서버에 존재하는 디지털 정보를 수집·수색하는 방법을 규정한다. 2022년 현재 이 조약에는 미국·캐나다·일본·필리핀 등 66개국이 참여하는데, 지역 내 조약에 그치지 않고 전세계적 조약의 위상을 갖춰나가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뒤늦게 해당 조약의 가입 가능성을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안다. 독일은 형사소송법과 연방범죄수사청법에 범죄 예방 목적뿐만 아니라 수사 목적(범죄 진압)으로 정보 수집을 가능하게 한 온라인 수색 관련 규정을 두고, 실시간 전송되는 정보를 대상으로 한 암호통신감청 규정까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2022년 5월부터 ‘온라인 수색 활동의 적법성 검토와 도입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도 온라인 수색을 적용할 수 있는지 보겠다는 것이다.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 보고서(‘아동·청소년 성착취 피해예방과 인권적 구제 방안 실태조사’)에서도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디지털성범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범죄로 이행되기 이전에 범죄 예방의 측면에서 온라인 수색은 더욱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2022년 7월 이원상 조선대 법학과 교수는 ‘온라인 수색의 도입 필요성과 한계’라는 논문에서 “이제는 독일의 규정들과 활용 상황, 한국의 강제수사 관련 규정들을 고려해서 온라인 수색을 도입하는 방안을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에도 시간만 날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온라인 수색은 여러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적절한 통제가 전제되지 않으면 과도한 사생활 정보 수집, 기본권 침해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이에 대한 우려를 넘어설 만한 국민적 합의나 공감대가 없을 경우 갈등 요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존 압수수색 과정에서도 절차적 위법성이 발생하는 등 문제가 많은데, 온라인 수색을 도입하면 인권침해 위험성이 더 커질 수 있다. 수사기법 측면에서도 한계가 있다. ‘저장된 정보’에 한정해 수집·수색이 가능할 뿐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정보에는 접근하기 어렵고, 범죄자의 정보기술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한 해킹 프로그램의 제작과 지속적 관리도 문제이며, 암호화된 정보의 경우 확보하더라도 내용 확인이 어려울 수 있다.

한국은 여전히 변화하는 온라인 환경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망각과 삭제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피해자를 위해 우리 사회가 할 일은 미적거리며 논의만 하다가 시간을 날리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것이다. 범죄자에게 ‘반드시 잡힌다’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다. 온라인 수색은 한계가 있지만 그런 방법의 하나로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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