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꿈 접고 '민주' 헌신한 최광열 선생 벌써 가다니요"

한겨레 2022. 9. 2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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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0일 우리 '보라매 테니스' 회원들에게 경천동지할 비보가 날아들었다.

최광열 선생이 간암 4기 판정을 받고 입원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지난 7월11일 최 선생이 별세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부고를 받았다.

돌이켜보니, 최 선생이 살아온 이력은 회원들로부터 드문드문 들었을 뿐 구체적으로 아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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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기억합니다] 고 최광열 선생 애도하는 동지의 글
지난해 둘째 딸 결혼식 때 하객들을 맞고 있는 최광열(왼쪽) 선생 부부. 김광철 주주 제공

지난 4월20일 우리 ‘보라매 테니스’ 회원들에게 경천동지할 비보가 날아들었다. 최광열 선생이 간암 4기 판정을 받고 입원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날 이후 ‘카톡’ 또는 병문안을 통해 위로의 말을 전할 때마다, 최 선생은 “걱정과 격려의 말씀들, 고맙고 힘이 됩니다. 그래요, 이 모든 걸 기필코 한여름 밤의 농담으로 만들어 버리겠습니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투병 중에도 <한겨레>를 찾아 읽을 정도로 굳건했다. 한동안 암 수치가 크게 떨어져 치료가 잘 되고 있다고 하여 다들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7월11일 최 선생이 별세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부고를 받았다. 평소 3~4시간이나 테니스를 해도 거뜬했던 그의 강철 체력을 믿었는데…. 향년 64.

테니스 모임은 서울사대 선후배들과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 등 7~8명이 함께해왔다. 이제 누가 있어 코트를 예약하고, 경기 결과를 분석하여 멋들어진 멘트를 날리고, 모일 때마다 따뜻한 쌍화차를 끓여 오겠는가?

돌이켜보니, 최 선생이 살아온 이력은 회원들로부터 드문드문 들었을 뿐 구체적으로 아는 게 없었다. 다만, 서울사대 역사교육학과 ‘전설의 80학번 운동권’이라면 더 들어 무엇하겠는가?

1979년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쓰러지자 전두환 신군부는 12·12를 일으켰다. 이들은 1980년 ‘서울의 봄’이 한창일 때, 5·17 비상계엄 확대를 통하여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야권 정치인, 재야인사들을 잡아들였다. 이에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군부독재 퇴진하라’며 시위를 벌이자, 계엄군은 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로 그 ‘군부독재 타도 투쟁’이 한창일 때 입학한 스무살 청년 최광열이 그 대열에서 빠질 리 만무했다. 그는 경찰에 잡혀가 갖은 고문을 받고 투옥됐다. 학교에서도 제적되자, 그는 인천에서 노동운동과 야학운동에 뛰어들었다 또 구속됐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경찰의 최루탄에 사망한 이한열 사건은 6월항쟁을 촉발시켰다.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던 군부 권력도 6월 항쟁에 굴복해 6·29 선언을 하고,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다. 제적된 학생들에게 복학의 길이 열렸지만, 최광열은 스스로 거부하고 현장을 지켰다. 이런 지난한 그의 투쟁에 ‘민주화 유공자’라는 증서 한장 딸랑 남겨져 있다.

그 뒤 그는 사회과학 서적 출판사 등을 옮겨 다니며 출판 운동을 했다. 때론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봉사 활동도 했다. 그런 활동 중에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도 하지만 빈한한 살림은 여전했다. 요즘은 ‘비폭력 대화’(NVC) 운동에 몰입하여 관련 책들을 출판하고 있었다. 지난해 둘째 딸 혼인시켰고, 내년에는 큰 딸도 결혼할 예정이었는데,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가셨다니 더욱 짠하다.

암 발병 이전 보라매 테니스 회원으로 활약하던 고 최광열 선생. 김광철 주주 제공

그가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역사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에게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배달민족의 웅대한 혼과 조국 통일의 기운을 불어넣도록 해야 했는데, ‘역도’들은 그를 놔두질 않았다. 그가 최루탄 자욱한 거리를 누비며 ‘군부독재 타도’를 외칠 때 고시원에 들어앉아 법률서나 뒤적이던 자들은 검찰이 되고, 이제는 국가 권력까지 거머쥐고 큰 칼을 휘두르고 있다. 미국, 일본의 눈치를 보며 노동자들을 짓누르고, 경찰·검찰권을 장악하여 자본의 배만 불리려 하고 있다.

아직은 연부역강한 최 동지가 이들을 심판하고 끌어내려야 하는데, 어찌 이리 돌아앉으셨단 말인가? ‘재인 박명’이라 했던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이리 황망히 그를 데려가시나이까? 산다는 것이 허망하다. 모두 엎드려 통곡한다.

“최 동지, 부디 잘 가시게. 이승에서 못다 이룬 일들은 선후배 동지들이 맡을 테니, 훌훌 털고 민주 세상에서 편히 잠드시게.”

서울/김광철 전 전교조 전국초등위원장·초록교육연대 대표

원고료를 드립니다 - <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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