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히잡 의문사' 반정부 시위, 31개주 80여개 도시로 확산..2009년 이후 최대 규모

박효재 기자 2022. 9. 2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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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반정부 시위대가 24일(현지시간)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 주도 아르빌에서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가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아르빌|AFP연합뉴스

이란에서 20대 여성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혐의로 체포된 뒤 숨진 사건으로 일어난 반정부 시위가 2009년 부정선거 의혹으로 촉발된 녹색운동 이후 13년 만에 최대 규모로 확산되고 있다. 이란 정부가 강경한 진압을 예고해 향후 시위가 더욱 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란 전체 31개주 80여개 도시에서 24일(현지시간) 동시다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고 AFP통신 등이 전했다. 이란 당국에 따르면 지난 17일부터 시작된 반정부 시위를 군경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날까지 최소 35명이 숨졌다. 인권 단체들은 최소 50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란 타스님 통신은 이날까지 적어도 1200명이 체포됐다고 전했다.

군경과 시위대 간 무력충돌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외신 보도 등을 종합하면, 보안군은 수도 테헤란을 비롯해 여러 도시에서 실탄을 사용해 시위를 진압하고 있다. 테헤란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경찰이 최루탄을 던지고 창문을 향해 사격하는 장면도 목격됐다. 시위대는 보안군을 구타하고 군경 차량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여성의 복장 등을 감시하는 ‘지도 순찰대(가쉬테 에르셔드)’ 본부를 폭파했다. 북서부 소도시 오슈나비에에서는 반정부 시위대가 이란 신정체제를 수호하는 이란혁명수비대(IRGC) 군인들을 막사 밖으로 몰아냈다고 이란 인터내셔널 등이 보도했다. 해외에 거주하는 이란인들도 24일 프랑스 파리, 스웨덴 스톡홀름, 그리스 아테네 등에서 이란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일주일 넘게 이어지면서 시위대 사이에서는 이슬람 공화국의 신정 통치를 끝내자는 구호가 나오고 있다. 테헤란 대학 시위대는 이란 이슬람공화국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겨냥해 “독재자에게 죽음을”, “히잡에 죽음을”, “언제까지 굴욕을 참아야 하나”라고 외쳤다.

가디언은 보안군과 시위대가 대규모로 충돌한다는 점에서 이번 시위가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해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인 2009년 ‘녹색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란 언론인 시마 사베트는 런던 소재 방송 이란 인터내셔널과 인터뷰에서 “2009년 녹색운동과 이번 시위의 가장 큰 차이는 사람들이 반격하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시위대는) 폭력 정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권단체 이란연대 국장 피루제 마흐무디는 가디언에 “2009년과 달리 대도시만이 아니라 그동안 시위가 없었던 중소도시에서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처럼 많은 여성들이 히잡을 벗어던지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시민들은) 경찰서를 불태우고, 경찰차를 추격하며, 하메네이의 사진을 불태우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시위는 과거 반정부 시위와 달리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처음으로 테헤란 북부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유층과 시장 상인 등 노동계급이 하나가 되고, 이란 주류인 페르시아인과 소수민족인 쿠르드족과 투르크족이 함께 참여하는 등 계층과 민족의 차이를 넘어 전방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란이 강경 보수 성향으로 회귀하고 경제 사정도 악화되자 국가 운영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이 커진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해 대선후보 자격 심사기관인 헌법수호위원회가 중도·개혁 성향 인사들을 배제하고, 하메네이 최고지도자 측근들에게만 후보 자격을 부여하면서 이란의 정치적 다양성을 파괴했다는 비난을 샀다.

미국 싱크탱크 중동연구소는 라이시 대통령은 대선기간 동안 새 일자리 창출, 새 주택 건설, 부패 척결 등 경제성장을 위한 과제에 집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대통령 당선 이후 어떤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라이시 정부는 서방과의 이란 핵합의 복원 협상 타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반면, 히잡 의무착용 규정을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겠다며 이를 단속하는 보안군에 대한 지원 자금은 늘렸다. 앞서 지난달 이란 정부당국은 공공장소 감시카메라를 통해 발각된 히잡 규정 위반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할 것이라고 밝혀 이란에 중국식 사회 감시체계가 확산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도 커진 상황이다.

이란 정부는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고 스마트폰 메신저 앱을 통한 시위 조직을 막고 있다. 미국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이란 정부의 인터넷 차단에 맞서 자사 저궤도 위성 인터넷 서비스인 ‘스타링크’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전날 미국 재무부는 미국의 사업자가 이란과 거래할 수 있는 품목에 소셜미디어 플랫폼, 화상회의 프로그램, 이란 정부의 인터넷 검열과 감시를 막는데 필요한 서비스 등을 추가하는 등 대이란 제재 지침 개정을 발표했다.

유엔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24일 “정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와 대중의 안전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강경 진압을 예고했다. 이란 정보부는 이란 내 모든 휴대전화 사용자에게 이란의 주적이 조직한 시위에 참여할 경우 샤리아(이슬람 율범)에 따라 처벌될 것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란 내 언론인보호위원회에 따르면 마흐사 아미니 사망 사건을 처음 보도한 일간지 기자 닐루파 하메디를 포함해 현재까지 최소 17명의 언론인이 체포됐다.

라이시 정부가 반정부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이어나간다면 군경과 시위대의 충돌이 더욱 격화하면서 이란 핵합의 복원 협상에도 타격을 입힐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싱크탱크 유라시아그룹은 이번 시위로 이란 정부는 서방국가들에 양보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었고, 이란 정부가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하면서 미국이 협상에 즉시 복귀할 가능성도 낮아졌다고 지적했다.

박효재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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