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과 진도 왜덕산, 그리고 '조선인의 코무덤'

정대하 2022. 9. 2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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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진도 왜덕산 위령제 열려
<창녕조씨> 족보에서 무덤을 알려주기 위해 왜덕산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박주언 진도문화원장 제공

‘하나의 전쟁, 두 개의 무덤’

전남 진도 왜덕산 위령제가 24일 진도군 고군면 내동마을 왜덕산 앞에서 열렸다. 전남 진도문화원과 일본 교토평화회 공동 주관으로 열린 위령제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등 한일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추모사에서 “일본은 한때 여러분들에게 큰 고난을 안겨줬다. 우리의 죄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이 더는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계속 사죄해야 한다”고 밝혔다.

왜덕산의 유래 왜덕산(倭德山)은 “왜인(일본인)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의미를 지닌 공동묘지로 알려져 있다. 진도 민중들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조선 수군과의 명량해전에서 사망한 일본 수군 100여구의 주검을 수습해 일본 쪽이 보이도록 묻어 줬다. 하지만 “내놓고 자랑할 일도 아니다”라는 생각에 묻어 두었던 사연을 박주언 진도문화원장은 2002년 삼별초 항전 흔적을 답사하다가 발굴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박 원장은 “고 이기수씨 내동마을 이장한테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왜덕산 이야기를 들었다. 왜덕산은 고군면 내산리 산 162번지, 161번지, 160번지 일대 전체를 말한다”고 말했다.

24일 오전 전남 진도군 고군면에 있는 왜덕산엔 명량해전 때 목숨을 잃은 일본 수군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 있다. 연합뉴스

왜덕산이라는 명칭은 민간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박 원장이 확보한 <창녕조씨> 족보에 조상들의 무덤의 위치를 기록하면서 왜덕산이 나온다. 고군면 내동리와 마산리 중간지점의 160번지 일대 창녕조씨 문중 선산에 묻힌 42명의 묘가 모두 족보에 기록된 지명이 왜덕산과 관련이 있다. 박 원장은 “범덕산(凡德山), 왜덕산(倭德山), 덕산(德山), 와덕산(臥德山), 왜덕전(倭德田), 외덕산(外德山) 등으로 표기되었고, 사람들은 ‘왜덕밭’ 또는 ‘와덕밭’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본의 코무덤 왜덕산 소식은 2006년 진도에 답사하러 온 히구마 다케요시 히로시마 수도대학 교수(사회학)의 신문 투고로 알려졌다. 히구마 교수와 학생, 일본 시민 등은 그해 8월15일 진도 왜덕산을 찾았다. 왜덕산을 고리로 한 한일 민간단체 교류가 이어지면서 일본엔 교토평화회(대표 아마기 나오토)가 만들어졌다. 교토평화회는 2016~2019년 일본에 있는 조선인 코무덤을 찾아가 ‘코무덤 평화제’를 열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지난해 11월 정유재란 때 조선인들의 코를 묻은 무덤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 적이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24일 오전 전남 진도군 고군면 왜덕산 위령제에 참석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무덤(鼻塚·귀무덤으로도 불림)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조선인들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인 뒤 가지고 가 조성된 무덤이다. 22~24일 진도문화원이 ‘하나의 전쟁 두 개의 무덤’이란 주제로 연 국제학술회의에서 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인류학)는 ‘진도 왜덕산과 도쿄 이총에 관한 인류학적 고찰:덕과 공양의 비교문화론’을 발표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코무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양한 도요쿠니신사 정면 약 100m 거리에 있다. 전 교수는 “무덤 앞 석비(1898년 3월20일)엔 코무덤이 조성된 지 300년 기념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비문에 ‘명복을 빈다’ ‘적의 코를 잘라’라는 등의 말이 나온다.

전 교수는 일본 사료 등을 검토한 뒤 베어져 묻힌 코의 수를 5만6476개로 추정했다. 전 교수는 “왜장 1명당 평균 6275명의 조선인 코를 베었다는 것인데, 이 숫자의 3배가 넘는 왜장들이 돌격부대장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베어간 조선인 코의 숫자는 드러난 숫자의 3배인 20만개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 교수는 “진도 섬사람들은 바다에 밀려오는 주검을 보고 사회적 공동규범으로서 덕을 행한 것이다”며 “정유재란이라는 특수한 시간 속에서 저질러진 일본군의 행위와 연동된 비총을 일본문화의 특수성과 문화 상대성이라는 관점 속에서 고찰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양한 도요쿠니신사 앞 동상과 코무덤 조성 배경이 적힌 비석. 전경수 교수 발표문

코무덤은 오랫동안 귀무덤으로 바뀌어 불렸다. 도쿄대 호시노 박사는 “교토 대불전 앞의 무덤은 코무덤이요 귀무덤이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1997년 9월 28일 코무덤 조성 400주년 학술회에서 나카오 히로시 교토 조형예술대학 명예교수도 코무덤의 1급 사료로 깃가와가 문서에 “코영수증은 있으나 귀영수증은 한장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코무덤이 확실하다”고 밝힌 바 있다. 에도시대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1583~1657)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보>(1642~1658)에 귀무덤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박 원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던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코라 하면 너무 잔인하니까 귀라고 하자’고 건의해 ‘귀무덤’이 됐다고 한다. 일본 5곳에 코무덤이 있다”고 전했다.

23일 오후 전남 진도군청에서 진도문화원장 박주언 진도문화원장(왼쪽)과 아마기 나오토 교토평화회 대표가 교토 코(귀)무덤 평화제 공동추진 업무협약을 했다. 연합뉴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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