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인간] ⑧ 러브호텔 난립 막아낸 '40인의 노인들'

홍인철 2022. 9. 2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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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우리가 지키자" 의기투합 선암회 회원들
숙박업소 설립 지침 개정 끌어내 모텔 신축 막아
모텔촌 앞 어린이 놀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 편집자 주 =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가 노인층의 핵으로 진입하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노인 비율이 2018년 14.4%로 '고령 사회'에 들어선 데 이어 2025년 20.6%로 '초고령 사회'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100세 이상 역시 1990년 459명에서 2020년 5천581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수명이 점점 길어져 '고령 국가'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를 사는 노인에게 돈과 건강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젊은 층과 세대 갈등, 외로움과 고독, 가족·사회와 분리되는 소외 등을 들여다보아야 할 시점이다. 연합뉴스는 노인이 존엄성을 지키며 행복한 삶을 위해 개인과 사회, 국가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15편에 걸쳐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자고 한다. ①∼④편은 한국 노인의 실상과 실태를, ⑤∼⑩편은 공동체에 이바지한 노인들을, ⑪∼⑮편은 선배시민 운동과 과제 등을 싣는다.]

진천노인복지관 관장(왼쪽에서 두번째)과 김재호 선암회 회장(가운데) [촬영 홍인철]

(진천=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농촌지역인 충북 진천군에 '무인 모텔(러브호텔)'이 시나브로 하나둘 늘었던 때가 있었다.

주민들은 이를 우려했지만, 딱히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해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앞장선 것은 다름 아닌 노인들이었다.

"교육도시인 진천에 새벽까지 환한 불빛의 러브호텔이 웬 말이냐"

"호기심 많은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골목마다 모텔이 생기면 주택 가치가 떨어지고 사생활이 침해받는다"

"타지역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모텔인데,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이 받는다"

노인들은 자발적인 회의를 통해 무인 모텔을 '주택가의 유해시설'로 결론짓고 "이미 자리 잡은 모텔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금부터 신축은 막아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했다.

곧바로 지자체를 찾아 무인 모텔이 더는 신축되지 않도록 요청했지만, 법규상 문제가 없다는 답변만 받았다.

하지만 40명의 진천군 노인복지관 노인으로 꾸려진 '선암회(先巖會)' 회원들은 이에 수긍할 수 없었다.

선암회는 '디딤돌 역할을 하는 바위(巖) 같은 선배(先)들 모임'이다.

김선이 진천군 노인복지관 과장은 "그때가 2016년이었는데, 당시 어르신들이 '노인이 주도적으로 지역사회에 유익한 역할을 해보면 어떨까'라고 고민했다"고 전했다.

'우리 동네는 우리가 지키자'고 의기투합한 노인들은 우선 진천군의 무인 모텔 실태를 파악하기로 했다.

서너 명씩 조를 짜서 진천군의 2개 읍(邑)·5개 면(面)에서 전수조사에 나선 것이다.

김재호 선암회 회장(왼쪽)과 민형수 회원 [촬영 홍인철]

김재호(78) 선암회 회장은 "낮에는 영업하는지를 알 수 없어서 주로 밤에 현장에 갔다"면서 "모텔 인근에 숨죽이며 잠복하다가 간판에 불빛이 켜지면 (모텔) 사진을 찍어 자료를 모았다"고 말했다.

민형수(81)씨는 "모텔 주인이 '왜 사진을 찍느냐'며 몸싸움이라도 걸어오면 자칫 큰 사고도 날 수도 있어 무척 마음을 졸였다"고 떠올렸다.

혼자가 아닌 서너 명씩 조를 짜서 활동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파악한 무인 모텔은 7개 읍면에 총 23개였다.

모텔의 주소는 물론 건축물 현황, 모텔과 모텔 사이의 거리 등도 조사했다.

자료를 정리했지만 "노인분들이 무인텔에 가실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 "자기 땅에 모텔 지어서 자기가 영업하겠다는데 웬 참견이냐"는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군청 문을 거듭 두드리면서 '개발행위 허가의 강화'라는 요지의 제안서를 냈다. 하지만 군청은 '지침 개정이 이런저런 이유로 어렵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제안서를 수정하고 제출한 결과 군청은 무인 모텔 난립 방지를 위한 '진천군 개발행위허가 운영지침'을 개정했다.

'도로에서 50m 안에 (무인 모텔이) 입지하지 아니할 것'이었던 비(非)도시 지역의 숙박시설 허가 지침이 ▲ 도로에서 200m로 입지하지 아니할 것 ▲ 주거밀집지역으로부터 300m 안에 입지하지 아니할 것 등으로 바뀐 것이다.

신축 조건이 대폭 강화됨으로써 사실상 무인 모텔 인허가 받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정도로 어려워진 것이다.

운영 지침 강화 덕분인지 현재 진천군의 무인 모텔은 총 21개다.

무인 모텔 난립 우려로 지역사회가 잔뜩 긴장했던 6년 전보다 오히려 2개가 줄었다.

김재호 회장은 "'무기력하게만 보이던 노인들이 직접 나서서 무인텔 신축을 막은 덕에 지역 이미지와 분위기가 훨씬 좋아졌다'는 칭찬의 인사를 받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 단체에서 이 사례를 공유하자고 연락이 오거나 우리가 뭔가를 해냈다는 자부심에 무척 기뻤다"며 뿌듯해했다.

계단에 안전 손잡이 설치 전과 후의 모습 [진천노인복지관 제공]

이들 노인은 또한 매달 한 차례씩 지역문제에 관한 토론을 벌여 우선순위를 정하고 각 단체와 연대해 실천에 나서고 있다.

환경개선을 위해 지역 사회단체들과 함께 쓰레기를 무단 방치한 곳에 꽃밭을 조성하는 '게릴라 가드닝'과 군청 및 환경단체와 '쓰레기 분리수거 및 환경 관리' 등의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위태롭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노인들을 위해 안전 손잡이를 설치하고 노인들이 자주 찾는 보건소와 복지관 인근의 위험한 도로에 인도를 새로 만들어 노인보호구역을 만들기도 했다.

특히 세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후배 시민들과 다양하게 소통한다.

'꼰대' 이미지를 깨기 위해 세대공감 토크쇼를 열어 젊은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지역 내 대안학교 청소년들과는 분기별로 만나 '공감 꽃길'을 조성하는 한편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응원한다.

이처럼 활발한 노력에 공감한 진천군은 선암회 노인들이 10월 말에 개최할 예정인 '선배시민 토크 콘서트'에 이례적으로 600만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노인보호구역으로 변신한 도로 [촬영 홍인철]

이종욱 진천군노인복지관장은 "자신은 물론 주변을 둘러볼 여유 없이 전력 질주한 노인들이 집에서 할 일 없이 지내다가 선배시민의 길로 걸어간다"면서 "경험과 지혜를 축적한 노인들이 연대해서 공동체의 문제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면 숙연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돌봄을 받는 무기력한 존재로 인식되던 노인들이 여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실천하면서 지역사회를 돌보는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ich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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