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에는 5000명이었는데..올해는 3만5000명이 '기후정의' 외치며 쓰러졌다
24일 오후 5시쯤 서울 시청역과 광화문 광장 인근에서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수만명의 시민들이 아스팔트 바닥에 죽은 듯이 몸을 뉘었다. 땅바닥에 누운 시민들은 종이 상자를 재활용해 만듯 손팻말에 ‘이대로 살 수 없다’ ‘기후재난 OUT 불평등 OUT’ ‘석탄발전 중단하고 신공항계획 철회하라’ 등의 문구를 적어 들었다. 기후 재난과 기후 불평등에 항의하고, 앞으로 다가올 우려스러운 미래를 경고하는 취지의 ‘다이-인(Die-in, 죽은 듯이 눕는다는 뜻)’ 퍼포먼스였다. ‘기후정의행진’을 주최한 ‘9월 기후정의행동 조직위원회’(기후정의행동 조직위)는 “죽어가는 지구에 조의를 표하고, 다시 우리가 살려낼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기후정의행동 조직위에는 시민단체, 정당, 노동조합 등 각계각층 400여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날 서울 시청역과 광화문, 남대문 주변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3만5000여명이 모였다. 국내에서 열린 환경 분야 집회 가운데 사상 최대 규모다. 3년 전 2019년 열린 기후정의행진에는 약 5000명이 참석했다. 기후정의행동 조직위는 “3년이 지나는 동안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더 넓고, 깊어졌으며 위기감도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봤다.
참석 인원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해졌다. 주축인 환경단체에 정당, 지역모임, 노동조합 등이 대거 참여했다. 장애인, 기본소득 요구 모임 등 얼핏 기후위기와는 관계가 적어 보이는 단체들도 다수 모습을 보였다.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참여한 시민들
행진에 앞서 오후 3시부터 본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기후위기 최전선 당사자’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청소년과 청년 대표로 나선 청소년기후행동 소속 김보림씨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 모두가 안전할 수 있는 사회 말고는 우리가 안전할 수 있는 사회는 없다”면서 “기후위기는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임을 우리 모두가 외쳐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자 대표로 발언에 나선 공공운수노조 금화PSC지부 소속의 박종현씨는 “10년째 발전소 유지·보수 업무를 하면서 밤낮없이 발전소가 차질 없이 굴러가도록 일해온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석탄화력발전소가 기후위기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2030년 이내에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 예정이지만 정부는 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에 대한 대책은 전혀 세우지 않고 있다”며 “정의로운 전환을 얘기하는 이들이 많지만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은 10년 넘게 일한 곳을 떠나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젠더·장애·인권 분야 대표로 나선 문예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는 “얼핏 생각하면 기후재난과 장애인 상관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지난 8월 대홍수 속에서는 발달장애 장애인과 가족들이 처참하게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국가와 사회는 이렇게 누구나 누려야 하는 안전에 대한 권리를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보장받지 못하도록 방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4시가 되자 행진이 시작됐다. 방송 차량만 10대가 참여했다. 녹색연합이 주도하는 차량 뒤로 ‘산과 바다의 행진’이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산호 모양, 산 모양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행진했다. 녹색연합은 미리 아프리카 댄스팀 쿨레칸에 ‘산과 바다가 행진한다면’이라는 주제로 춤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이 춤을 집회 참가자들과 함께 배운 뒤 행진 때 선보였다. 행진 차량 옆에서는 댄서들의 춤도 이어졌다. 정성우군(13)은 “해수면 상승, 지구 온난화, 해양쓰레기 같은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고, 지구가 너무 빨리 더워지는 거 같아서 이날 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가족단위 참가자도 많았다. 이경미씨(47)와 우성민씨(47)는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4학년의 자녀들과 함께 이날 집회에 나왔다. 이씨는 “아이들에게 기후위기가 왜 중요한지 집회에 나오기 전에 이야기하고 나왔다”고 말했다. 우씨는 “내 전공이 화학공학이라서 오염을 일으킨 주범이다”라며 “위기가 아이들한테 넘어갈 것이라서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서울 월천초등학교에서 ‘유해물질로부터 자유로운 학교’ 동아리에 참가하고 있는 조건우군(11), 이다인양(11)과 박수광군(12)은 교사 강현정씨(46)와 함께 행진에 참여했다. 강씨는 애초 “집회에 혼자 참여할 생각이었지만, 학생들이 먼저 ‘기후문제에 대해 배우고 이야기 나눴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않겠냐’며 행진에 참여하겠다고 알려왔다”고 털어놨다. 2019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기후집회에 참석했다는 박군은 “기후위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태풍, 폭우로 다치고 죽었다”며 “내일 우리 동네에도 포스터를 많은 곳에 붙여서 많은 사람이 알게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강씨는 “행진에 참여하기 전에는 이 같은 학생들의 계획을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전북 무주의 대안학교인 푸른꿈고등학교에서는 전교생 60여명 중 50여명의 학생들과 교사들이 참석했다. 2학년 최민희양(18)은 “학교에서 다 같이 행진에 참석하면 좋은 경험이 되겠다고 뜻이 모여서 참석하게 됐다”며 “청소년들은 지금 당장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에서 친구들과 함께 행진에 참석한 김진하군(15·가명)은 “뉴스를 통해서, 날씨를 통해서 매년 지구가 계속 더워지는 것을 실감하고 있고 지구가 아무도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가는 것 같다”며 “그럼에도 정부가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모여서 목소리를 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기후정의행진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반려동물과 함께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이재원씨(33)는 배우자, 강아지 망고(4)와 함께 이날 서울 도심을 행진했다. 이씨는 이날 집회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서울)강남역 홍수 이후 보도를 통해 기후위기와 폭우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위기의식이 더 커졌다”며 “반려견을 키우며 동물권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영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각계각층의 시민들 모여 외친 ‘기후정의’
취약계층을 돌보는 사회복지사들도 기후정의를 요구하며 이날 행진에 참여했다.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에서 활동하는 이정민 사회복지사는 “쪽방, 좁은 원룸에서 에어컨과 선풍기가 없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방 온도가 40도까지 올라갔고, 폭우 피해를 본 사람도 많다”며 “불평등과 빈곤에 처한 취약계층을 만나는 사회복지사로서 기후정의를 앞장서서 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승려와 수녀 등 종교인들도 다수 참여했다. 불교기후행동의 상임대표인 일문 스님은 “경기도에서 살며 작은 텃밭 농사를 하는데 6~7년째 겨울에 눈이 많이 오지 않고, 봄에 가물었다”며 “기후위기의 영향을 느끼고 있어서, 신자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참여했다”고 말했다. 조경자 가톨릭 기후행동 공동대표는 “‘사랑’을 추구하는 종교계가 이 자리에 모여서 함께 걷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적절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은 사회는 평화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노동자들도 “기후위기가 내 문제”라고 말했다. 신대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국발전기술지부 지부장은 “발전소 노동자들도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석탄화력을 폐쇄하는 데 다 동의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다만, 일자리에 대한 정부 대책이 없어서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려고 이 자리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김종민 민주노총 배달플랫폼 노조 기획정책실장은 “배달노동자들은 날씨가 아주 뜨거운 시간에도 일을 쉴 수 없다”며 “기후위기의 피해를 보는데도 사회적 보장은 없는 문제를 느껴서 기후정의행진에 나왔다”고 말했다.
행진은 광화문을 거쳐 지하철 안국역, 종각역 등을 지나 다시 시청역 인근으로 이어졌다. 참여자들은 오후 7시쯤부터 시작된 문화제까지 즐긴 뒤 해산했다.
강한들 기자 hand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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