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닮고 싶다는 어르헝, 한국 여자배구 새 희망으로
세대교체 소용돌이 속 침체 빠진 대표팀에 '한 줄기 빛
(시사저널=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9월5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2022~23 한국배구연맹(KOVO) 여자 신인선수 드래프트. 49명의 대상자 중 1순위로 페퍼저축은행에 가장 먼저 호명된 선수의 이름은 낯설었다. 체웬랍당 어르헝(18·목포여상)이었다. 몽골 출신의 그는 이미 아마추어 배구계에서는 유명하다.
194.5cm로 최장신…지금도 계속 성장, 2m 가능성도
어르헝은 2004년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태어나 2019년 한국으로 왔다. 배구를 시작한 지 2년 만이었다. 몽골에 있을 때 한국 드라마와 한국 음식, 그리고 방탄소년단(BTS)을 좋아했던 그는 배구로 코리안 드림을 꿈꿨다. 한국에서 열심히만 하면 배구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15세이던 그의 키는 이미 191cm가 넘었다.
2021년 어르헝은 목포여상 출신인 KGC인삼공사 주전 세터 염혜선의 가족에게 입양됐다. 국가대표 주전 세터이기도 한 염혜선이 부모를 설득했다. 염혜선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열심히 뛰고 한국에서 배구를 하고 싶어 하는데, 국적 문제로 그게 불가능할 수 있다고 해서" 입양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때부터 어르헝은 염어르헝으로 불렸다. 몽골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이름은 유지했다.
어르헝은 '귀화 선수로서 드래프트를 신청한 선수 또는 귀화 신청 후 귀화 승인이 완료되지 않았지만 전 구단의 동의로 귀화 절차 중인 선수는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배구연맹 규약에 따라 이번 드래프트에 나왔다. 어르헝의 키와 무한한 잠재력에 전체 구단들이 열린 마음을 갖게 된 것. 어르헝의 현재 키는 194.5cm. V리그에서 지금 뛰고 있는 김연경(흥국생명·192cm)과 양효진(현대건설·190cm)보다도 크다. 2022~23 시즌에 데뷔하면 역대 여자선수 최장신 기록을 갖게 된다. 아직도 자라고 있는 어르헝은 내심 2m까지도 욕심낸다.
좋은 일은 연이어 찾아왔다. 드래프트 이후 한국 국적 취득에도 성공한 것. 소속팀 페퍼저축은행에 따르면 어르헝은 9월16일 광주출입국외국인사무소에서 귀화 면접시험을 봤고, 다음 날 합격 통지를 받았다. 두 번의 낙방 끝에 기어이 통과했다. 10월22일 개막하는 2022~23 V리그에 출전하는 데 걸림돌은 이제 없다.
어르헝은 막내 구단인 페퍼저축은행의 미들 블로커(센터)로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창단 2년째인 페퍼저축은행의 선수층이 그다지 두텁지 않기 때문에 데뷔 첫 시즌부터 경기 출전시간은 많을 것으로 보인다. 김형실 페퍼저축은행 감독은 "최장신 선수로 우리 팀의 약점인 미들 블로커를 보강하고자 어르헝을 지명했다"면서 "지금보다는 앞으로 성장을 내다보고 뽑았다. 프로에서 담금질해 민첩성을 보완하면 앞으로 훌륭한 선수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대표팀 '미들 블로커 꿈'…"민첩성 보완" 필요
어르헝의 등장은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에도 희망을 준다. 김연경, 양효진, 김수지(IBK기업은행) 등이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가운데 대표팀 평균 높이를 확 끌어올릴 수 있다. 배구가 높이 싸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르헝은 신체 조건만으로도 충분히 대표팀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전망이다. 2022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9월23일~10월15일, 네덜란드·폴란드)에 출전한 대표팀 면면을 보면, 미들 블로커로 이주아(흥국생명·185cm), 이다현(현대건설·185cm), 박은진(인삼공사·187cm)이 뽑혔는데 모두 어르헝보다 작다. 배구에 입문한 지 5년밖에 안 됐다는 점도 더욱 성장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코로나19 때문에 많은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김형실 감독의 말처럼 민첩성 또한 보완이 필요하다.
귀화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어르헝이 대표팀에 뽑히는 데 장벽은 없다. 국제배구연맹(FIVB)은 규약을 통해 특정 국적이 있고 원소속 협회 또한 같은 국가로 돼있는 선수에 한해 해당 국가대표팀에서 뛸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어르헝이 몽골에서도 배구를 했기 때문에 원소속 협회를 바꿔야 할 가능성은 있다. 이 경우엔 국적 취득과 2년 거주 요건을 비롯해 양쪽 협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대표팀 경험이 없는 어르헝은 2년 거주 요건이 면제된다. 국적 취득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제 양쪽 협회 동의만 받으면 소속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르헝에 앞서 중국 지린성 옌지 출신의 재중동포 이영(2020년 은퇴)이 2014~15 시즌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6순위로 GS칼텍스에 지명돼 리그에서 뛴 적이 있다. 키 180cm의 레프트 공격수 이영은 2016년 국가대표로도 뽑혀 아시안컵에서 뛰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진 못했다. 참고로 남녀 통틀어 최초의 귀화 배구선수는 화교로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대만 국적을 갖고 있던 후인정(현 KB손해보험 감독)이었다. 후인정은 '스커드미사일'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국가대표 부동의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어르헝 스스로도 태극마크에 많은 욕심을 낸다. 그는 드래프트 1순위 지명 직후 "염혜선 언니와 (국가대표로) 같이 뛰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국적 취득 뒤 아시아대회, 세계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하고 싶다"는 소망도 밝힌 어르헝이었다. 프로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근력을 키우고 차근차근 경험을 쌓으면 그의 꿈도 조만간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여자배구는 2012 런던올림픽에 이어 2020 도쿄올림픽에서 4강 신화를 썼다. 그리고 그 안에는 '김연경'이라는 스타가 중심에 있었다. 김연경이 처음 국가대표에 뽑힌 시기는 2005년 만 17세 때였다. 김연경도 배구 센스와 더불어 큰 키가 최대 무기가 됐다. 이후 경험치가 점점 쌓이면서 월드클래스로 발돋움했다.
김연경이 2021년 8월 열린 도쿄올림픽 직후 대표팀에서 은퇴한 뒤 한국 여자배구는 세대교체 소용돌이 속에서 부진한 국제대회 성적을 남겼다. 2022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12전 전패를 당했다. 큰 기대를 모았던 쌍둥이 자매(이재영-이다영)가 과거 학폭으로 사실상 대표팀에서 제명된 가운데 어르헝의 등장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어르헝의 롤모델은 김연경이다. 어르헝은 인터뷰 때마다 "김연경 선수의 득점 모습을 닮고 싶다"고 말해 왔다. 공교롭게도 그의 프로 공식 데뷔전은 10월25일 흥국생명전이 될 전망이다. 흥국생명에는 중국리그(상하이)를 거쳐 국내 리그에 1년 만에 복귀한 김연경이 있다. "항상 용감하고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어르헝. 그의 '코리안 드림'이 여자배구계의 드림으로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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