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집이 사라진 도시, 홈리스의 도시다

한겨레 입력 2022. 9. 24. 14:45 수정 2022. 9. 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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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홈리스
어느날 사라진 독거노인의 집에
살기 시작한 홈리스 고운과 한결
가난의 폭력성 예민하게 인식한
'기생충\' 문제의식 이은 수작
영화 <홈리스>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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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는다. 가난하기 때문에, 고립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로부터 쉬이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죽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두 작품이 모두 징글징글한 가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탓에 나는 한동안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는데, 이 문화상품의 판매자들만은 명성을 얻고 큰돈을 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의 생존 경기를 그대로 차용한 서바이벌 예능을 제작한다는 소식에는 당황하고 말았다.

혼자 살던 할머니가 사라졌다

우리 시대 자본주의가 깔아놓은 생존주의와 무한경쟁 시스템을 비판하는 작품이 결과적으로 서바이벌 게임에 동참하기를 부추기고 그렇게 상금 456만달러를 향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스펙터클로 삼는 예능 상품으로 귀결된다니, 이 기이한 광경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드라마 내외적으로 전시된 ‘일확천금’과 ‘글로벌 스타’를 향한 꿈 외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또 무엇일까. 케이(K) 콘텐츠에 대한 국민적 자부심?

<기생충>이 계급을 ‘직조’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보다 가난 자체를 비난하고, <오징어 게임>이 계급사회의 폭력을 사유하기보다는 그것을 즐길거리로 삼아버리는 한계에 갇히게 되었을 때, 결국 가난은 글로벌 시장에서 제1세계가 되기를 꿈꾸는 한국 대중문화의 탁월한 개성이자 셀링포인트가 될 뿐이다. 한동안 한국영화는 그곳에서 아시아 남성의 상상된 야만성과 폭력성을 신나게 팔아 재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와중에 임승현 감독의 <홈리스>를 만났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문제의식을 이어가고 있는 수작으로 평가받는, 그 작품이다.

화사한 아파트 안. 갓난쟁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식탁 앞에 앉아 있다. 아기랑 놀아주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두 사람. 신혼집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듯도 하다. 하지만 젊은 부부가 의자에서 일어나 움직이자 이내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모델하우스, 집처럼 꾸며 놓았지만 집이 아닌 곳이다. “이런 데서 살면 진짜 아무 걱정 없겠다.” 가짜 침실에 놓여 있는 침대 위에서 아들 우림이를 재우며 고운(박정연)이 말한다. 한결(전봉석)도 마음이 쓸쓸하다. 두 사람은 모델하우스를 나와 오늘 밤을 보낼 찜질방으로 향한다.

영화 <홈리스>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젊은 부부는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움직인다. 고운은 우림이를 안고 전단지를 뿌리고, 한결은 배달 노동을 한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재개발 지역에 저렴한 전세를 구한 두 사람은 입주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 곧 찜질방을 전전하는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는 게 현재로선 두 사람이 버티는 힘이다. 그런데 부동산 업자가 전세자금을 들고 날아버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림이까지 찜질방에서 다친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 황망한 와중에 한결이 머물 곳을 구해 온다. 평소에 심부름을 해드리던 ‘독거노인’ 할머니가 미국 아들네로 가시는 길에 한달 동안 집을 맡겼다는 것.

그렇게 젊은 부부는 ‘쌔끈한’ 아파트는 아니지만 세 사람이 오붓하게 지낼 수 있는 단기 ‘홈 스위트 홈’으로 들어간다. 한동안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까 싶은 것도 잠깐, 한결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집에는 점점 이상한 냄새가 배어들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정말 미국으로 떠났을까? 한결은 할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앞으로 한결은, 그리고 고운은 또 무슨 일을 벌일 것인가.

<홈리스>는 당신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영화일 것이다. 영화는 가난과 폭력의 스펙터클을 분리한다. 한국 대중문화가 가지고 있는 뻔한 편견 중 하나는 가난과 물리적 폭력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가난한 남자는 타인에게 주먹을 휘두르거나 타인의 주먹 앞에 무릎을 꿇는 것 외엔 삶의 방식이 없다는 듯 그려진다. 가난한 여자는 자신의 몸을 다양한 폭력 앞에 기꺼이 내던진다. 그렇게 물리적 폭력에 절여진 신체 이미지가 아니라면 가난의 문제를 다룰 방식을 모르는 채로 가난은 폭력을 빚고 폭력은 가난을 담아내는 싸구려 그릇이 된다.

그러나 <홈리스>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가난의 폭력성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을 흉포한 인간의 얼굴, 특히 가난한 자의 얼굴로 쉽게 대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누군가의 절망에 기생하는 ‘명품’이 지배하는 사회의 공기와 그 공기를 흡입해야 하는 두 사람의 내면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그 안에는 사회의 무관심과, 무관심을 먹고 자라는 고독과, 고독과 함께 번식하는 비관이 반지하방의 곰팡이처럼 퍼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로소 가난의 고통을 함께 숨쉬게 된다. <홈리스>가 사회드라마이자 치밀하게 짜인 심리드라마로도 다가오는 이유다.

영화 <홈리스>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집이 사라진 홈리스의 도시

<기생충>을 보고선 봉준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오징어 게임>을 봤을 땐 넷플릭스의 글로벌 자본에 대해 생각했다. <홈리스>를 보고 어두운 극장을 나와 태양 아래 섰을 땐, 내가 거주하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서울이 하나의 거대한 모델하우스처럼 느껴졌다.

어디를 가도 대단지 아파트가 위용을 자랑하는 곳. 이렇게까지 집이 많을 일인가 싶을 정도로 아파트가 켜켜이 쌓여 있는데도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이들이 자력으로 구할 수 있는 집다운 집은 어디에도 없는 곳. 화려한 외관의 아파트는 스스로 광고판이 되어 “이것이야말로 ‘정상의 삶’이 움트는 공간”이라고 홍보하지만 그 ‘정상의 삶’이란 금융상품에 기대지 않으면 실천 불가능한 생지옥. 그야말로 집이 사라진 도시, 홈리스의 도시다.

당연하게도 가난을 다루는 방식에 정답은 없다. 관객에 따라 영화를 보면서 각자 다른 경험을 할 터다. 다만 나로서는 <홈리스>가 만들어낸 각성의 순간에 더 오래 머물 수밖에 없었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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