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질 받을까 광주 사람이란 걸 숨기고 살았어요"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2022. 9. 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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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정신적 손해배상㊵] 입대 앞두고 폭행당한 최필호씨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지난 21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만난 최필호씨(63)가 80년 5월 당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고 있다. 2022.9.24/뉴스1

(광주=뉴스1) 박준배 이수민 기자 = "광주 출신인 걸 알면 선입견을 품고 볼까 봐, 불이익 받을까 봐 충청도가 고향이라고 속이고 살았어요. 너무 죄스럽고 창피한 일이죠."

5·18유공자 최필호씨(63). 덤덤하게 고향 얘기를 하던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왁스로 매끈하게 넘긴 머리와 깔끔한 재킷 차림의 최씨 얼굴이 금세 민망하고 부끄러운 듯 붉어졌다.

지난 21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최씨를 만났다. 서울에 거주하는 최씨는 9월부터 매주 수요일 광주를 방문하고 있다. 5·18단체가 9월 한 달간 운영하는 '5·18민주학교' 교육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5·18민주학교는 오월 정신과 5·18민주화운동의 전 과정, 민주유공자들의 사명 등을 비롯해 민주·인권·평화 이슈를 다루고 활동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다.

5·18 피해 당사자인 최씨는 누구보다 광주의 오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교육받지 않아도 충분하지만 수업을 듣는 이유는 '부채감' 때문이라고 했다.

"올해 1월까지 서울에서 고깃집을 했어요. 거긴 전국에서 사람이 몰리는 곳이니까 지역감정이 심하잖아요. 광주 출신이라고 하면 '폭도 아니냐' 소리 들을까 봐 사투리를 안 쓰려고 하고, 자격지심에 숨기고 살았거든요."

1980년 스물한 살이던 최씨는 광주 북구 신안동 고모네 집에 얹혀살았다. 그해 군 입대를 앞두고 입대 전까지 가족 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해 5월은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로 하루하루가 시끄러웠다.

최씨는 5월18일 오후 3시쯤 학생들이 시위 중인 동구 수기동 현대극장 앞으로 향했다.

"계속되는 시위에 그 내용이 궁금하기도 하고 군사정권이 들어 선다니 막연한 걱정도 들더라구요. 호기심에 나간 거죠."

현대극장 앞에는 전남대와 조선대 등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열고 있었다. 학생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현 시국을 비판했다.

최씨는 옆에 있던 학생에게 "시위에 처음 나왔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 물었다.

학생들은 최씨를 환영하며 전두환 신군부가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운동가 20여 명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내란 음모죄로 구속하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또 '전두환은 물러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 구호도 알려줬다.

최씨도 함께 구호를 외쳤다. 구호를 외친 지 10분쯤 지났을 무렵 공수부대와 전경 등 수백 명이 다가와 시위대와 대치했다.

지난 2020년 한국일보가 공개한 5·18미공개 사진. 80년 5월 광주 동구 금남로 한 골목에 계엄군의 탱크가 들어오고 있다.ⓒ News1DB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향해 '불법 집회'라며 해산하라고 했다. 학생들이 "불법 집회가 아니다"라고 맞받아쳤다.

군인들은 허리춤에서 1m 정도 길이의 곤봉을 뺐다. 군인들이 곤봉을 들자 학생들도 준비해뒀던 돌을 손에 쥐었다.

군인들이 시위대에 달려들었다. 무자비한 폭행이 이어졌다. 곳곳에서 피가 터졌고 몇몇 학생들은 극장 안으로 대피했다.

최씨도 깜짝 놀라 도망쳤다. 그때 어떤 한 아가씨가 이마에 피를 흘리며 극장 외벽을 짚고 있는 모습을 봤다.

"굽이 있는 구두를 신어 도망치기도 쉽지 않아 보이더라구요. 그 아가씨를 근처에 있는 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고 나와 다시 도망치는데, 거리는 이미 쑥대밭이 돼 있었어요. 사방에 다친 사람들이 가득했고 피 흘리는 학생들은 끌려가고 있었구요."

겁이 난 최씨는 양동 방향으로 무작정 달렸다. 뒤에선 군인들이 쫓아왔다. 무서워 문이 열린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주머니가 유리문을 걸어 잠그며 '얼른 숨으라'고 했다.

잠시 뒤 군인들이 식당 앞에서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주인아주머니가 '왜 그러냐'고 묻자 군인들은 다른 말 없이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결국 최씨는 그 자리에서 잡혔다.

"차라리 문을 열어 달라고 했으면 아줌마도 버티다가 열어줬을 텐데, 그냥 막 무지막지하게 부수니까. 우리를 겁주려고 그런 거예요. 주인아주머니한테 엄청 미안했죠."

최씨는 군 트럭에 실려 조선대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갔다. 이동하는 내내 군인 예닐곱 명이 엎어진 최씨를 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었다.

차에서 내릴 때쯤 트럭은 피로 흥건했다. 바닥엔 깨진 안경이 뒹굴었다.

"조대 운동장에 도착했을 땐 해가 지고 있었어요. 군인들에게 붙잡힌 시민은 100여 명 정도 됐는데, 대부분 폭행당해 심한 상처를 입고 주저앉아 있었죠."

그때 서른 살쯤 돼 보이는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군인들에게 대들었다.

그는 "어떻게 당신들이 감히 우리 광주시민을 함부로 대할 수 있냐"며 "국민의 세금으로 산 총으로 국민을 쏘고, 때리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항의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군인 수십 명이 달려들어 발길질해댔다.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군인들이 몰려 짓밟았다. 잠시 뒤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질질 끌려갔다.

"그 남자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 이후로 40년이 지나도록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아마 죽은 듯해요.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시민들은 다 쫄았죠. '여기서 죽겠구나' 싶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요."

최씨는 그날 밤 상무대로 옮겨졌다. 좁은 상무대 영창에 200~300명쯤 붙잡힌 시민들이 수용됐다. 다닥다닥 붙어 숨 쉬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탁해졌다. 군인들은 한 명씩 불러 조사를 했다.

80년 5월18일 당시 계엄군에 의해 연행되는 시민군들. ⓒ News1DB

상무대에서 나흘째인 5월22일, 아침부터 군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끌려온 시민들을 부대 안 강당으로 집합시켰다. 강당으로 향하는 길에 상무대 밖에서 "석방하라 석방하라"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당에 모이자 군인이 큰소리로 단단히 겁을 줬다. "오늘 석방을 해줄 테니 다시는 시위에 참여하지 말아라. 한 번 더 잡혀 오면 즉각 총살하겠다."

최씨는 곧장 나주 영산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지난 며칠간 군인들에게 된통 당한 터라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사람을 안 가리고 막 팼잖아요. 내가 맞고, 남들이 피 철철 흘리는 모습을 봤으니까 '무법천지'의 그 형상이 머리에서 안 잊혔어요. 너무 끔찍해서 맨날 꿈에서 깨 울었어요."

입대 영장은 81년 초에 나왔다. 군에 입대하게 됐지만 당초 계획이었던 '현역' 입대는 하지 못했다. 5·18에 가담했던 사실이 국방부 기록에 남아 '방위'로 근무했다.

나주에 있는 31사단의 한 대대에서 일하는 동안 군 간부들은 최씨를 대놓고 차별했다. 입대 첫날부터 "5·18 가담자는 불이익을 주겠다"며 교관들도 엄포를 놓았다.

차별은 제대 후에도 계속됐다. 공무원이 꿈이었던 최씨는 당초 전역 후 공무원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포기해야 했다. 상무대 영창에 함께 있었던 지인들이 취업에 제약을 받는다고 했다.

"5·18에 참여했다고 하면 추려낸다고 하더라고요. 군대에서 외박 금지 받은 건 기본이고요, 취업 못하고 공무원 면접에서 탈락하고 이런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공무원도 안 된다고 하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광주 금남로 거리에 나가면 그때의 기억이 최씨를 괴롭혔다.

1983년, 광주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겠다며 서울로 떠났다. 서울살이도 쉽지 않았다. 배달 일과 막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1989년 중매를 통해 결혼을 했다. 서울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 역시도 고향이 전라도라 최씨를 이해해줬다.

여러 지역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울에서는 광주 출신이라는 점을 숨기는 것이 편했다.

불이익을 받을까, 선입견을 품고 볼까 봐 사투리를 안 쓰려고 하고 충청도가 고향이라고 속였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인데도 어느 날 오월 광주를 욕하면 그때부터 위축돼 다가가지 못했다.

1990년 국가에서 5·18 피해자를 위한 일시적 보상금을 지급했다. 최씨는 장애 14급으로 보상금 3800만 원을 받았다. 그간 모았던 돈과 합쳐 작은 호프집을 열었다.

"일일이 하나하나 기록해 놨다가 보상해 달라고 못 하니까 더 답답하죠. 우리 유공자들은 5·18로 낙인찍히고 '인생의 실패'를 겪었어요."

그러나 악몽은 계속됐다. 몸이 피로한 날이면 식은땀과 함께 군인들에게 폭행당하는 꿈을 꿨다. 정신병원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의사에게도 거짓말을 해야 했다.

"'어떤 트라우마가 있냐'고 의사가 묻는데 뭐라고 말을 못 하겠는 거예요. 혹시나 의사가 5·18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지금은 그나마 보수 세력만 우리를 욕하지만 그땐 다들 '간첩'이라고 했거든요."

지금도 트라우마는 계속된다. 5·18 얘기가 나오면 누구는 '당신 참 훌륭한 일을 했다. 덕분에 민주화를 이룩했다'고 말하지만 어떤 누구는 '당신 폭도 아니냐'며 욕을 해댔다.

5·18을 아는 이들과 활동이 필요했다. 김포에 집이 있어 5·18부상자회 인천지부에서 활동하며 주말이면 동지들을 만났다.

1999년 3월과 5월에는 하반신이 마비된 11공수여단 출신 김요한 장병을 만나 '5·18부상자-진압부대 화해의 만남'을 추진하기도 했다. 최씨는 당시 보도됐던 신문 기사들을 스크랩해 여전히 들고 다닌다.

최필호씨가 가지고 온 1999년 3월과 5월의 신문 기사들. 5·18부상자회가 하반신이 마비된 11공수여단 출신 김요한 장병을 만나 '5·18부상자-진압부대 화해의 만남'을 하고 있다. 2022.9.24/뉴스1

인터뷰가 끝날 무렵 최씨가 취재진에게 "많이 힘드시겠다"고 말을 건넸다.

인천지부에서 5·18피해자들의 실태 조사를 담당하고 있다는 그는 "다른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듣는 것만으로도 간접 고통이 클 것"이라고 취재진을 이해해줬다.

그러면서 직·간접 정신적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가 실태조사를 해보니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요. 병원 가고 싶을 때 가고, 정신적인 것도 치료받을 수 있는 세상을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우리가 90년도에 받은 보상금은 전부 그 당시에 '몸' 치료비로 써서 돈이 없어요. 대부분 회원이 70~80세니 그분들 편히 가실 수 있도록 후유증에 대한 치료를 받게 해드리고 싶어요."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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