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징했던 피아노..코롤리오프, 바흐를 살려내다
(서울=연합뉴스) 나성인 객원기자 = 현존 최고의 바흐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예브게니 코롤리오프의 바흐 협주곡 공연이 2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펼쳐졌다.
2017년 이후 5년 만에 내한한 코롤리오프는 바흐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가운데 솔로를 위한 협주곡 2곡을 비롯, 두 대 및 세 대를 위한 협주곡 2곡씩을 포함해 모두 6곡을 선보였다. 협연자로는 코롤리오프의 아내인 룹카 하지게오르지에바와 코롤리오프의 제자 안나 빈니츠카야가 나섰다. 스무 명 남짓의 현악 편성으로만 구성된 서울시향은 객원악장 강수연이 리드하며 호흡을 맞췄다.
1부는 바흐의 세 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d단조(BWV 1063)로 시작됐다. 제 1피아노가 전체를 주도하고 다른 두 사람이 보조하는 형태로 무척 역동적인 작품이었다. 코롤리오프의 피아노는 명징했고, 다른 두 피아니스트 역시 조화로웠으나 관현악은 다소 어수선하게 들렸다.
서울시향 단원들은 아무래도 좀 더 규모가 큰 관현악에 익숙한 듯, 바흐 협주곡이 요구하는 보다 정밀하고 엄격한 앙상블을 들려주지는 못했다. 잔향이 다소 긴 롯데콘서트홀의 특성을 고려해야겠지만, 피아노와 현악 사이의 미세한 균열이 느껴졌다. 물론 독주부와 합주부가 교차하면서 그러한 순간들이 바로잡히긴 했으나 아쉬운 대목이었다.
두 번째 곡은 많은 사랑을 받는 하프시코드 협주곡 5번 f단조(BWV 1056)로 특히 2악장 라르고의 선율은 유명하다. 독주를 맡은 안나 빈니츠카야는 흔히 러시아를 대표하는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알려졌지만, 이날 연주에서는 따뜻하고도 절제된 터치로 품격 있고 우아한 바흐를 들려줬다.
오케스트라도 첫 곡보다는 한결 나은 연주를 들려줬다. 그러나 동형리듬을 반복하며 쫓고 쫓기는 바로크 음악 특유의 진행에서 드러나야 할 평정심과 형식미 대신 서울시향은 다소 달아오르는 격정으로 기울어졌다. 물론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작품들을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서울시향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추동력은 빈니츠카야의 절제미와는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1부 마지막 곡은 두 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c단조(BWV 1060)로 흔히 바이올린과 오보에를 위한 협주곡을 다시 건반 악기에 맞춰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롤리오프 듀오인 두 부부의 앙상블은 정갈하고 담백했다. 특히 서정적인 2악장에서 두 대의 피아노가 들려주는 음악적 대화는 구조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아주 뛰어났다. 서울시향은 피치카토의 음형으로 이 둘을 보조했고, 두 대의 피아노는 유연하고도 따뜻하여 하나의 유기체를 이뤘다.
2부의 첫 곡에서는 안나 빈니츠카야와 룹카 하지게오르지에바가 앙상블을 이뤄 바흐의 두 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c단조(BWV 1062)를 연주했다. 이 작품은 원래 유명한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BWV 1043)을 편곡한 것으로, 두 독주 악기 및 관현악이 서로의 음형을 모방하며 점증적인 고조를 이루게 돼 있다.
두 사람의 연주는 매끄럽고 유연했으나 관현악과의 호흡은 코롤리오프가 제1피아노를 맡을 때에 비해 다소 헐거웠다. 그러나 유명한 2악장에서는 오히려 그 여유로움이 따뜻한 감동의 순간을 연출했다. 특히 두 사람은 바이올린을 연상케 할만큼의 자연스러운 칸타빌레를 선율 안에 녹여냈다.
이어지는 하프시코드 협주곡 7번 g단조(BWV 1058) 역시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BWV 1041)의 편곡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코롤리오프는 이 곡에서 바흐 대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깨끗한 음색, 명료한 성부 진행, 역동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는 감각이 시종일관 반짝였다.
그는 중간중간 손짓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기도 했는데 앙상블의 합 또한 전체 공연 가운데 이 곡에서 가장 훌륭했다. 이날 공연의 마지막 작품은 전체 프로그램 가운데 유일한 장조 곡이자 화사하고 장엄한 작품인 세 대를 위한 하프시코드 협주곡 C장조(BWV 1064)였다.
1부의 첫 곡과 마찬가지로 세 대의 피아노가 함께 연주하는 작품이었지만, 1부에 비해 훨씬 몰입과 집중이 훌륭했던 연주였다. 현악 유니즌의 밀도, 고음과 저음의 대비, 악구의 명료성 등에서 서울시향의 음악가들은 높은 수준을 들려주었다.
세 사람의 피아니스트도 자기 색깔을 드러내며 악상을 이끌었다. 명징하고 군더더기 없는 코롤리오프, 따뜻하고 넉넉한 하지게오르지에바, 두 사람 사이에서 절제미와 색채감 있는 터치를 들려준 빈니츠카야의 앙상블은 국내 관객들에게 바로크 피아노 음악의 신선한 즐거움을 전해주기에 충분했다.
전문 바로크 악단이 아니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바흐를 연주하는 서울시향의 시도는 충분히 박수를 보낼 만했다. 다양한 작품, 연주, 접근법을 전하려는 열정과 시공을 초월하는 바흐 음악의 생명력이 더해진 더없이 풍요로운 저녁이었다.
lied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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