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에서 벗어나려는 푸틴의 몸부림, 점점 더 깊은 늪 속으로
전쟁 뒷받침할 경제적 능력도 의문..푸틴의 정치적 운명에도 영향
(시사저널=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9월21일 대국민 연설에서 밝힌 30여만 명의 예비군 부분 동원은 그가 재래식 전쟁에서 휘두를 수 있는 '마지막 칼'을 뽑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예상치 못한 수많은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일 수도 있다. 현지 국영 타스통신과 스푸트니크뉴스 등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는 동원 가능 자원 2500만 명 중 대통령령에 따라 예비군 30여만 명을 소집한다.
푸틴의 동원령은 우크라이나가 8월19일 우크라이나 남부에서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한 지 한 달, 9월6일 동북부 하리키우 지역에서 개시한 지 보름 만에 이뤄졌다. 우크라이나는 하리키우 반격으로 3000㎢의 영토를 수복했다. 이번 동원령으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밀리고 있으며 위협을 느낄 정도로 병력 손실(또는 부족)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 됐다. 푸틴과 러시아 국방부는 동원이 '부분'이라는 데 방점을 찍었으며,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은 "대학생 징집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심 동요를 우려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지난 2월 개전 당시에도 '동원'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7개월 만에 식언이 됐기 때문이다.
'핵 카드' 꺼내든 건 내부 여론 수습용?
푸틴은 동원령을 발표하면서 서방이 반러시아 정책을 계속하며 핵 위협을 해왔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도 이에 대응할 수 있다는 위협을 잊지 않았다. 전가의 보도처럼 핵 카드를 다시 내민 셈이다. 여기에는 크게 네 가지 의도가 읽힌다.
첫째, 책임 회피다. 동원에까지 이른 사태 악화의 책임이 전쟁을 결정한 자신이나 작전을 제대로 펴지 못한 군 당국에 있지 않고 서방에 있다고 주장하는 국내 정치용 코멘트로 볼 수 있다.
둘째, 민심 동요 방지용이다. 러시아가 있지도 않은 서방의 핵 위협을 받고 있다는 '망상'을 이야기한 것은 혁명 세력이 외부의 적에게 둘러싸여 있다며 단결을 호소했던 옛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고전적인 수법의 21세기적 계승에 다름 아니다. 국제적인 고립 앞에 초조한 심정을 은연중에 보였을 수도 있다.
셋째, 러시아가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서방을 압박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특히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무기 공급을 막아보자는 의도가 엿보인다. 최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의 공격으로 탄약고를 비롯한 러시아 측 주요 전술 목표가 타격당한 피해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에 장거리 무기체계 공급도 요청했지만, 러시아 본토 공격에 따른 확전을 우려한 서방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넷째, 자국민을 향해 러시아가 핵보유국이니 별일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불리한 전황을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동원령을 발표하면서 핵무기를 함께 거론한 것은 그만큼 내부 불안정을 우려한다는 의미다.
동원령은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피해가 상당하며 병력과 탄약 부족 등으로 작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내부에서 제기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병력 손실은 어느 정도일까. 군사작전의 불확실성을 가리키는 '전장의 안개' 때문에 현재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정확한 사상자를 파악하기 어려우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아군 피해는 축소하고 전과는 과장해 발표하는 게 사실이다.
소련 몰락 재촉한 아프간 전쟁 악몽 떠올라
러시아 당국은 9월21일까지 우크라이나가 6만1207명의 사망자와 4만9368명의 부상자를 냈다고 주장한다. 반면 자국군의 피해는 사망자 5937명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군 5만5100명이 사망하고 9만8000~11만7000명이 부상했다고 주장한다고 CNN이 보도했다. 자국 군대는 1만 명 정도의 사망자와 3만 명 수준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위성 관측이나 현장 비디오 수집 등으로 사상자를 파악해온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군이 8월초까지 사망자 2만 명을 포함해 7만~8만 명 정도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본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서방 언론은 러시아의 동원령을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라고 평가한다. 그만큼 푸틴이 다급해졌다는 이야기다. 일부에선 러시아 이름으로는 마지막으로 동원령을 내린 제1차 세계대전이, 1917년 2월 멘셰비키 혁명에 뒤이은 11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차르 체제를 몰락으로 이끌었다는 지적도 한다.
이번 참전은 1979~8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소련은 연인원 62만 명을 동원했으며, 가장 많을 때는 11만5000명이 동시에 주둔했다. 당시 소련군의 인적 피해는 연구조사에 따라 사망 1만4453~2만6000명, 부상자 5만3753명으로 나타났다. 서방이 추정한 우크라이나 전선의 러시아군 소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문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피해와 전비 부담이 냉전체제 당시 미국과 자웅을 겨루던 소련의 몰락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당시 소련은 연속 흉년으로 주요 수출품인 곡물 수출 난항까지 겹치면서 심각한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거기에 열악한 보급 속에서 고전한 제대군인들이 귀향하면서 국내 여론이 악화한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이번에도 러시아가 동원 병력 30여만 명을 재훈련시키고 전선에 투입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수용 시설과 지급할 무기체계와 탄약·차량·소모품 등을 적시에, 충분히 공급하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지만 현재 러시아의 경제력, 특히 제조업으로는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풍선효과로 러시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러시아가 30만 병력의 신속한 전선 투입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는 전쟁의 향배뿐 아니라 푸틴의 정치적 운명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푸틴이 아무리 러시아 민족주의와 팽창을 앞세운 유라시아주의를 바탕으로 높은 지지율을 유지한다고 해도 전쟁 패배와 희생자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군 사기도 문제다. 동원령을 발표하면서 군인의 탈영, 자진 항복, 전투 거부, 명령 불족종, 약탈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는 군기위반처벌법 강화 법안도 함께 내놓은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조치는 푸틴이 현재의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면 이 조치들은 푸틴이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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