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조선의 첫 스웨덴 경제학사는 귀국 후 왜 요절했을까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2. 9. 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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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31년 스톡홀름대 졸업한 최영숙, 5개국어 능통했으나 취업 실패
최영숙은 1931년 2월 스톡홀름대를 졸업했다. 조선의 첫 스웨덴 경제학사였다.

‘인도는 중국과 애급과 마찬가지로 상고(上古)문명국이다. 그러나 그 찬란한 역사와 문명은 오늘날에는 다 어디가고 지금은 일개 섬나라인 영국의 지배밑에 있다. 산천에 흐르는 젖과 꿀은 어이해 인도의 딸과 아들의 살과 뼈를 기르는 데 아무런 인연이 없어졌는가.’ (‘인도유람’1, 조선일보 1932년2월3일)

1932년초 신문에 인도유람기가 실렸다. 여행기 형식이지만, 인도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와 사로지니 나이두(시인·1879~1949)를 소개하는 기획이었다. 필자는 스웨덴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최영숙이었다. 이집트를 거쳐 인도에서 4개월 가량 머물면서 현지 사정을 관찰한 그는 이렇게 썼다.

‘스와데쉬(인도말로 물산장려회) 상점은 거리마다 흥왕하고 있다. 인도인들은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하고는 모두 물건 값을 더 주거나 외국 물품을 사용하면 자기에게는 경제적 리(利)가 될지라도 결코 외국 상점에 가서 사쓰지 않고 꼭 스와데쉬 상점에 가서 자기들의 쓸 것을 사쓰기로 위주한다.’(‘인도유람’ 1) 인도를 빗대 조선의 물산장려운동을 지지하고 민족 의식을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1932년2월3일 조선일보에 실린 최영숙의 '인도유람'1. 첫회부터 인도의 스와데쉬운동을 소개하면서 물산장려운동과 민족의식을 자극했다.
위키피디아 1931년 런던을 방문한 마하트마 간디. 최영숙은 같은 해 간디를 만나기 위해 인도를 방문할 만큼, 그를 흠모했다.

◇쇠약한 간디 연설에 ‘부모 유언 듣듯 감격의 눈물’

최영숙은 ‘내가 인도를 찾아간 일이나 인도에서 오래 머물게 된 이유는 ‘깐듸’ ‘나이두’ 두분을 만나고 싶은 까닭이었다’고 썼다. 마침내 1931년 7월 초 봄베이에 도착한 간디를 만났다. 이집트에서 인도로 향하는 배 안에서 만난 나이두의 생질 ‘로氏’의 소개 덕분이었다.

‘반나체인 그의 끝없이 수척한 팔과 다리! 코끝에 반쯤 걸린 안경, 쾌활한 웃음을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몇 개 안남은 웃니! 크고 둥근 머리 꼭대기에 서너 오라기 뒤로 늘어진 긴 머리끝. 이같이 그의 외모는 보잘 것없지만 그의 인격! 그의 정신! 그의 행동은 세계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인도유람’3, 조선일보 1932년2월5일)

두 번째 만남은 8월29일 아침이었다. 수십만 남녀가 모인 넓은 운동장에서 마이크 앞에 선 간디가 연설을 시작했다. ‘놀라지 말라!그렇게도 수척하고 쇠약하여 보이는 간디씨의 음성은 산곡을 울릴 듯 말귀마다 힘있게 울려 나왔다. 청중은 마치 부모의 유언이나 듣는 듯이 고요하고 정숙하게 서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최영숙의 별세를 알리는 조선일보 1932년4월25일자 기사.

◇귀국 다섯 달 만에 쓰러져

간디의 육성과 인도 실상을 르포한 최영숙의 이름은 두 달 뒤 신문에 다시 등장한다. 이번엔 부고(訃告)였다. ‘여자의 몸으로 외국의 최고 학부를 마치고 경제학사의 학위를 얻어가진 후 작년 11월에 금의환향하였던 시내 홍파동(2의 10) 최영숙 여사는…지난 23일 오전 11시에 이 세상을 영별하고 말았다.’(‘구십춘광을 등지고 애석! 여인의 요절’,조선일보 1932년4월25일)

한국 최초의 스웨덴 유학생인 최영숙은 1931년 2월 스톡홀름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그리스, 터키, 이집트, 인도를 여행했다. 1931년 11월 귀국한 최영숙을 신문들은 대서 특필했다. ‘조선 초유의 여류 경제학사 최영숙양’ ‘서전에서 돌아온 최영숙양은 다섯 나라 말을 통하는 재원’(조선일보 1931년12월22일). 이런 인재가 제대로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귀국 다섯달만에 세상을 떴다. 애석한 죽음이었다.

◇배추, 미역, 미나리, 콩나물 장사까지

최영숙은 ‘첫 여성 경제학사’란 타이틀이 무색하게 ‘취업난’에 시달렸다. ‘불쌍한 조선 사회를 위하여 한 조각 붉은 마음을 가지고 발버둥이 치는 여성이니 그가 고국에 돌아오는 날은 반드시 한줄기 희망의 불이 비칠 것’(‘엘렌 케이 찾아가 서전 있는 최영숙양’, 조선일보 1928년4월10일)이라고 했지만 그가 일할 만한 곳은 없었다. 신문 기자, 교사 자리를 얻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포목상을 하면서 여유있던 집안 살림이 기울어지면서 노부모 생계까지 책임져야했다.

최영숙은 귀국 직후 ‘처음 조선을 다시 찾을 때에 현하의 급무인 경제운동과 노동운동에 몸을 던져 산 과학인 경제사회학을 더욱 살려보려고 하였으며 공장 직공이 되어 그들과 같이 실제 운동을 하려 하였으나 집 사정이라든지 여러 가지 형편에 많은 변동이 있어 당장에 취직이 문제’ (조선일보 1931년12월22일)라고 호소했다.

최영숙은 서대문 밖 교남동에서 채소가게를 열었다. 운영난을 겪던 ‘여자소비조합’을 인수해 벌인 일이었다. 8년 유학 끝에 스웨덴 경제학사 학위를 받은 최영숙이 ‘배추 포기, 감자, 마른 미역 줄기, 미나리단, 콩나물단을 만지는 것’(’삼천리’제4권제5호, 1932년5월)이 일과가 됐다. 유학파 신여성이 이런 구멍가게를 꾸리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인도계 혼혈아 출산으로 가십거리

최영숙은 홑몸이 아니었다. 인도 체류 때 얻은 사랑의 열매였다. ‘어린애를 가진 몸에 영양부족, 소화불량, 그는 각기병까지 걸려서 두 다리는 차차 부어올라오기 시작했다.’(’동광’제34호, 1932년6월) 병원에 실려간 최영숙은 1932년 4월11일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산모 상태가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고 태아를 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후로도 호전되지 않아 4월13일 세상을 떴다.

최영숙이 인도인의 피가 흐르는 혼혈아를 출산했다는 뉴스는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미혼으로 알던 조선의 첫 여성 경제학사가 혼혈아를 낳고 죽었으니, 가십거리가 될 만했다. ‘스톡홀름대에서 만난 인도 유학생’(삼천리) ‘인도 여행중에 만난 한국계 혼혈’(동광) 등 잡지들은 아버지의 정체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최영숙의 죽음은 무성한 가십에 휩싸였다.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를 찾아 스웨덴에 유학한 최영숙의 사연을 소개한 조선일보 1928년4월10일 '엘렌케이 찾아가 서전 있는 최영숙양'

◇엘렌 케이 흠모해 스웨덴 유학

최영숙의 이력은 독특했다. 이화여고보를 졸업한 1923년 중국으로 유학간 것부터 그랬다.최영숙은 ‘나는 남달리 일본 유학을 싫어하였으며 까닭도 없이 중국 유학을 즐겨함에 따라서’(’삼천리’제4권제1호, 1932년1월)라고 공개선언할 만큼, 항일(抗日) 의식이 강했다. 남경 명덕(明德)여학교를 거쳐 회문(滙文)여자중학을 마친 1926년 스웨덴으로 향했다. 당대의 저명한 스웨덴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1849~1926)에게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엘렌 케이는 당시 신문, 잡지에 자주 소개된 유명 인사였다. 최영숙은 중국 유학 시절 엘렌 케이의 사상에 호응해 편지를 주고 받을 만큼 그를 흠모했다. 하지만 그가 1926년9월 스웨덴에 도착하기 직전 엘렌 케이는 세상을 떴다. 최영숙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구스타프 황태자의 고고학 연구 보조

최영숙은 고학생이었다.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어학을 공부하였다’고 일기에 썼는데,여기서 노동은 ‘자수’(刺繡)를 가리켰다. 베개 하나의 수를 놓으면 5, 6원의 수입이 생겼다. 이 돈으로 먹고 자고 저금까지 했다. 스톡홀름 대학을 다닐 때는 스웨덴 황태자 도서관에서 그의 역사고전 연구를 도왔다. 1926년10월 조선을 방문해 ‘서봉총(瑞鳳塚)’ 발굴 현장을 찾은 구스타프 아돌프(1882~1973) 황태자,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서봉총’의 첫 글자 ‘서’는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瑞典)에서 따왔다. 최영숙은 이 구스타프 황태자가 조선에서 가져간 역사고전 서적의 목록을 만들고 내용을 번역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1950년 즉위해 23년간 재위했다.

◇스키 타고 雪原 누빈 조선 여인

최영숙의 스웨덴 초반 생활은 고달팠던 모양이다. ‘서전의 풍경은 내가 어릴 때에 지리를 배우면서 상상하던 풍경은 아니었으며 또한 언어 풍속 등이 전혀 다르고 아는 사람조차 없으니 어찌 외롭고 쓸쓸하지 않았으리까? 그래서 나는 한달 동안은 밤이나 낮이나 울기만 했답니다.’ 최영숙은 월간 ‘삼천리’(제4권제1호, 1932년1월)에 학창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조선이라는 땅의 존재도 모르는’ 동료틈에서 부대끼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차츰 적응해나간 최영숙은 ‘다른 동무들과 똑같이 여름이면 수영으로, 겨울이면 스키로, 이렇게 세월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만하게 자미스러운 생활을 계속하던 일이 지금 와서는 끝없이 그리워집니다’라고 썼다.

스키를 타고 스웨덴 설원을 누비던 최영숙은 그토록 고대하던 고국 땅에서 스물 여섯 아까운 나이에 떠났다. 해외에서 닦은 실력을 펼쳐보지도 못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 경제학도로 살아갈 길은 매우 협소했을 것이다. 동경 유학 출신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이 하릴 없이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혹 마흔 넘어 해방 이후까지 살아남았다면 5개 국어에 능통한 최영숙에게 기회가 생겼을 지 모르겠다. 일찍 스러진, 안타까운 청춘이었다.

◇참고자료

최영숙, 네 사랑 받기를 허락치 않는다, 가갸날, 2018

이승원,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휴머니스트, 2009

성현경, 경성 에리뜨의 만국 유람기, 현실문화, 2015

전봉관,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 ‘신동아’ 2006년5월호

‘경제학사 최영숙 여사와 인도청년과의 연애관계의 진상’, ‘동광’ 제34호, 1932년6월

‘인도 청년과 가약 맺은 채 세상 떠난 최양의 비련’, ‘삼천리’제4권제5호, 1932년5월

최영숙, ‘간디와 나이두 회견기, 인도에 4개월 체류하면서’, ‘삼천리’제4권 제1호, 1932년1월

최영숙, ‘서전대학생 생활’, 삼천리 제4권제1호, 193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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