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러시아 엑소더스

이용수 논설위원 2022. 9. 24.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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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은 지뢰밭을 우회하지 않았다. 대인 지뢰를 밟아 죽으나 총포에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800만명 넘게 죽었지만 독일군 전사자도 280만명에 이른다. 미·영 연합군과 싸운 서부 전선 전사자(40만명)의 7배나 된다. 민간인까지 합치면 소련인 2900만명이 독·소 전쟁 때 희생됐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에 해당한다. 소련이 흘린 피에 히틀러가 빠져 죽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전쟁 초기인 1941년 9월 8일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시민들은 혁대, 책상 다리, 인육을 먹으며 버텼다. 100만명이 죽었지만 항복하지 않았다. 결국 독일군은 1944년 1월 27일 봉쇄를 풀었다. 872일 만이었다. 러시아가 ‘대조국전쟁’이라 부르는 독·소 전쟁 기간 탄생한 ‘불굴의 소련’ 신화 가운데 하나다.

▶스탈린이 독일만큼이나 미워한 게 미·영 연합군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이 독일과 싸우다 공멸하는 상황을 미·영이 기다렸다고 의심했다. 실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했을 때 독일은 이미 소련과 벌인 총력전으로 국력을 대부분 소진한 상태였다. 스탈린은 1945년 5월 8일 독일군 참모장이 프랑스 랭스에서 미·영 연합군에 먼저 항복하자 격분했다. 다음 날 소련군 총사령관 주코프는 베를린 근교로 독일군 총사령관을 불러 항복 문서에 다시 서명하게 했다. 소련의 전승절이 연합군의 전승절과 하루 차이 나게 된 이유다.

▶푸틴은 스탈린의 길을 걸어왔다.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들의 재산을 빼앗아 내쫓고, 방사성물질 ‘폴로늄’이나 화학무기 ‘노비초크’ 등으로 정적을 제거했다. ‘강한 러시아’를 부르짖으며 체첸(1999년), 조지아(2008년), 크림반도(2015년)를 잇따라 침략했다. 스탈린의 반대파 숙청과 동유럽 공산화 과정을 빼닮았다. 서방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감도 스탈린과 판박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푸틴의 지지율은 80%가 넘었다.

▶러시아를 탈출하려는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대적 반격으로 수세에 몰린 푸틴이 예비군 동원령을 내린 뒤 벌어진 현상이다. 조지아, 핀란드와 맞댄 국경엔 수㎞에 걸쳐 차량이 늘어섰다.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가는 편도 항공권이 매진되고 가격도 몇 배씩 뛰었다. 푸틴이 기대했던 ‘불굴의 러시아’ 속편과는 다른 흐름이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침공에 맞섰지만 푸틴은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을 벌인 차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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