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고구려 후손’의 침묵
함경남도 출신인 기자는 20년 전 한국에 입국한 이후 사극을 즐겨봤다. 재미도 있지만 북한 당국이 왜곡한 역사를 다시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구려, 발해를 주제로 한 ‘주몽’ ‘대조영’ ‘연개소문’ 등이 인상 깊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라고 강조하는 북한은 왜 이런 드라마를 만들지 못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중국 국가박물관이 한반도 고대사 연표에서 고구려와 발해를 고의로 뺀 것과 관련해 한국은 강하게 항의했지만 북한은 함구하고 있다. 한중 행사이기 때문에 북한이 침묵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강조해놓고 중국의 고구려 지우기에 눈을 감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북한이 중국의 고구려사, 발해사 왜곡에 침묵하는 건 처음이 아니다. 북한의 고구려 관련 사극은 1986년 제작한 ‘온달전’이 마지막이다. 1990년대 초 ‘단군릉’ ‘동명왕릉’을 만들었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평양 중심으로 기술하고, 김씨 왕조 세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다. 북한의 대표적 역사 100부작 만화 ‘소년 장수’는 배경이 고구려임에도 수, 당 등 고구려를 침략했던 중국 왕조를 공개적으로 거명하지 못했다. 대신 ‘돌탄국’ 등 황당한 이름을 붙였다. 북한은 2000년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북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는 적극 대응해왔다. 그런데 역사적 정체성의 뿌리로 삼는 고구려사를 중국이 왜곡하는데도 항의하지 못하는 건 중국에 기대 먹고사는 북한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북한이 고구려를 언급하며 중국을 비판한 것은 중국이 ‘핵 개발’에 제동을 걸었을 때다. 2015년 김정은의 핵 개발에 중국이 노골적으로 반대하자 조선중앙TV는 특집 방송에서 고구려를 공식 언급했다. “고구려는 사대주의를 몰랐고 동서 6000리 영토를 가진 강대한 나라였기에 사대주의를 할 까닭이 없었다”며 중국을 겨냥했다. 중국이 핵 개발을 막는다면 고구려처럼 들이받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세운 이후 중국을 40회 넘게 방문했지만 마오쩌둥은 한 번도 북한을 방문하지 않았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직후 김정은은 중국 지도부의 조전을 본인 이름으로 받지 못했다. 세습 정권을 인정받으려면 중국에 먼저 머리를 조아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을 것이다.
북한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계승자라고 강조한다. 반면 남한은 신라와 백제의 계승자라고 한다. 이 때문에 신라의 삼국 통일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고구려사는 칭송한다. 그러나 현재 고구려 역사는 후손을 자처하는 북한이 아니라 신라·백제의 후손이라는 한국이 대신 지켜주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중국 눈치를 봐야 하는 북한 처지 때문이다. 앞으로도 고구려 역사는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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