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미술관 난입 '배트맨' 조커가 꽂힌 기괴한 그림: 프랜시스 베이컨과 영화

입력 2022. 9. 24. 00:22 수정 2022. 9. 2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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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의 ‘교황’ 연작
경매사 크리스티가 지난 9월 2~5일 서울 분더샵 청담에서 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x아드리안 게니’ 특별전 가운데 전시됐던 베이컨의 ‘교황’ 연작. [사진 문소영]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배트맨’(1989)에는 악당 조커(잭 니콜슨)가 부하들과 함께 미술관에 난입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프린스의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면서 렘브란트, 드가, 르누아르의 명화에 사정없이 페인트를 뿌리고 난도질을 한다. 그러다가 한 그림 앞에 멈춰 서는데, 도축되어 반으로 갈라진 소의 사체가 어둠 속에서 십자가형을 당하는 것처럼 걸려 있고 그 사이에서 교황이 일그러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그림이다. 부하가 이 그림도 찢으려고 달려들자 조커가 말린다. “이건 좀 마음에 드니까 그냥 놔둬.”

이 그림 ‘고기와 함께 있는 인물’(1954)은 실제로 미국 시카고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작가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 우리나라에도 마니아 팬들이 있지만 (빅뱅의 지드래곤이 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아직 널리 잘 알려진 편은 아니고 주로 ‘엄청 어둡고 끔찍하지만 엄청 비싼 그림의 화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영화 ‘배트맨’(1989)에 나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사진: 워너 브라더스]

이달 초 열렸던 ‘2022 키아프×프리즈 서울 아트페어’를 맞이해 주요 미술품 경매사인 크리스티가 서울 청담동에서 베이컨의 무료 특별전을 열어 모처럼 우리나라에서 베이컨 작품을 여러 점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전시 기간이 불과 4일로 지나치게 짧았던 게 유감이지만 말이다. 이 전시에는 ‘배트맨’에 나온 그림과 연결되는 베이컨의 ‘교황’ 연작 세 점이 나왔다.

‘키아프×프리즈' 아트페어 중에 특별전 열어

프랜시스 베이컨은 왜 ‘교황’ 연작을 그렸을까? 카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그보다는 그가 바로크 시대 에스파냐 미술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1599~1660)에 꽂혔기 때문이며, 초상화 중에서도 가장 경건하고 권위 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신의 대리인’의 초상화를 비틀어서,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는 인간 존재가 고통 속에서 동물성을 드러내며 몸부림치는 그림으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트맨’에 나오는 그림에 대해 시카고 미술관은 이렇게 설명한다. “교황은 유리 상자 고문실에 갇힌 채 입을 벌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 동물 사체로 둘러싸인 베이컨의 교황은 타락한 도살자로 보일 수도 있고, 또는 뒤에 매달려 있는 도살된 동물과 다름없는 희생양으로 보일 수도 있다.”

베이컨은 개인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악몽 같은 그림을 그릴 만한 상황이었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인간이 그 죽은 육체에 있어서나 피폐한 정신에 있어서나 어디까지 한낱 짐승의 고기덩어리처럼 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털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들에 의해 정육점에 걸려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자화상을 위한 두 개의 습작’(1970). 경매사 크리스티가 지난 9월 2~5일 서울 분더샵 청담에서 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x아드리안 게니’ 특별전에 전시된 모습. [사진 문소영]

개인사적으로도 그는 불우했다. 아직 동성애가 범죄로 여겨지던 시대에 동성애자로 살아야 했다. 성 정체성을 깨달아가던 십대 시절, 어머니의 속옷을 훔쳐 입고 거울을 보다가 아버지에게 걸려 두들겨 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본래 부유한 집안 출신이지만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 되어 온갖 잡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술과 도박에 빠져들었다. 30대 중반부터 그의 작품이 빛을 보기 시작했지만, 도박 버릇 때문에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이미 그린 캔버스를 재활용하기도 했다.

베이컨이 도박에 빠진 이유는 지극히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세계관과 관련이 있었다. 죽고 사는 게 많은 부분 운에 달려있던 전쟁 통에서 인과보다 우연을 믿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고 이것이 운을 시험하는 도박 애호로 연결된 것이다.

이러니 ‘배트맨’에서 인간혐오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조커가 베이컨의 그림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조커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인연은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 끝나지 않는다. 버튼이 손을 뗀 뒤 한동안 침체에 빠졌던 배트맨 영화를 다시 화려하게 부활시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2008)는 베이컨의 그림이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그의 미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감독이 밝힌 바 있다.

영화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 분장 역시 베이컨의 작품이 영감을 줬다. [사진 워너 브라더스]

놀란은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에서 대화나 내레이션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면 미술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야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어릴 때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인데, 얼굴을 (뒤틀리게)표현하는 방식이 기억의 뒤틀림을 암시하는 것 같아 좋았다. 특히 그의 그림들의 황량함에 끌린다. 감정적으로 불편하긴 하지만 인간 경험의 한계, 세상에 대한 인간 이해의 한계를 생각해보도록 하기 때문이다.”

특히 히스 레저가 열연한 조커의 분장이 베이컨의 그림을 참고해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놀란은 이렇게 말했다. “조커의 광대 메이크업을 어떤 식으로 해야할지 정할 때 (원작 코믹스의 만화적인 모습보다)더 현실적이고 위협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에게 베이컨의 화집을 갖고 가서 물감이 어떻게 어우러지고 색채가 어떻게 섞여 갖가지 뒤틀린 얼굴 모습이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땀에 반쯤 지워진 듯한 축축한 조커 메이크업이 탄생했다. 히스 레저의 얼굴을 캔버스처럼 사용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그리고 위협을 내재한, 베이컨 그림 같은 얼굴을 만든 것이다.

베이컨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영화는 이외에도 많은데 그중 호세 파딜라 감독의 2014년 리메이크 버전 ‘로보캅’도 있다. 베이컨의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로부터 영감 받은 트립티크’가 영화 장면에 직접 등장한다. 정육점 고기처럼 해체되고 뭉개진 인간의 육체가 세 개의 화폭에 그려져 있는데 이 육체는 알 수 없는 기하학적 프레임에 걸려 있거나 갇혀 있다. 고대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주인공처럼 운명의 덫에 걸려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로보캅’에 나온 그림, 1000억에 팔려

‘로보캅’(2014)에 등장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로부터 영감 받은 트립티크’. [사진 콜럼비아 픽처스]
2020년 6월 코로나19 와중에 소더비의 실시간 온라인 경매에서 1015억원(수수료 포함)에 낙찰되어 지난해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프랜시스 베이컨(1909~92)의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로부터 영감 받은 트립티크’. [사진 소더비]

세 폭의 그림이 한 세트를 이루는 트립티크(triptych)는 베이컨이 즐겨 취한 형식으로 그는 총 28세트에 이르는 트립티크를 남겼다. 주로 중세/르네상스 시대 성당 제단화가 트립티크 형식이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을까? 베이컨은 특별히 종교적인 의미는 없으며, 다만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정육점의 고기가 십자가형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트립티크 형식을 종종 쓴다고 말했다.

영화 ‘로보캅’에서 폭탄테러를 당해 거의 사망에 이르렀던 경찰 머피(조엘 키너먼)는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기계 몸을 지닌 로보캅으로 재탄생한 후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그가 로보캅 수트에서 꺼내달라고 외치자 담당 과학자가 수트를 해체해서 그 안에 있는 머피의 몸을 보여준다. 남아있는 육신이라고는 머리와 심장을 감싼 선홍색 폐, 그리고 오른손뿐. 머피는 공포와 절망으로 비명을 지르다가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고도 슬픈 장면이다. 머피의 해체된 육체와 비명을 지르는 입은 베이컨의 그림과 절묘하게 연결된다.

영화 '로보캅'(2014)의 전체적인 디자인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사진: 콜럼비아 픽처스]

‘로보캅’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마틴 위스트는 파딜라 감독의 제안에 따라 베이컨 그림을 참고해 디자인 작업을 했으며 특히 로보캅이 탄생하는 연구소 디자인이 “베이컨 그림의 3D 버전”이라고 했다. 즉, 매우 간결하고 직선적인 연구소 한가운데에 머피가 로보캅 수트에 갇힌 채 기계에 매달려 있는데, 그 모습은 베이컨 그림에서 기하학적 틀 안에 갇혀 고깃덩어리처럼 매달려 있는 인간과 같다는 것이다.

‘로보캅’에서처럼 인공지능 등 신기술에 의해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지가 위협받는 상황은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신기술이 아니더라도 베이컨이 겪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처럼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지는 언제나 쉽게 짓밟힐, 그래서 인간이 한낱 고깃덩어리 신세가 될 위험은 늘 존재해 왔다. 그 때문에 베이컨의 무시무시하고 고통에 찬 그림이 그토록 인기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그림 값 얘기를 꺼내는 것이 무척 분위기 깨는 일이긴 하지만, 덧붙이자면 ‘로보캅’에 등장했던 그림은 2020년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1000억원에 팔렸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moon.soyoung@joongang.co.kr 미술전문기자. 서울대 경제학부 학·석 사, 런던대 골드스미스컬리지 문화학 석사, 홍 익대예술학과박사과정중.저서로 『그림 속 경제학』(2014), 『명화독서』(2018), 『광대하고 게으르게』(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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