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혁훈의 아그리젠토] 양곡관리법 개정에 반대하는 이유

정혁훈 2022. 9. 2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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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값이 급락한 요즘 쌀의 위상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이 전 세계적인 곡물 가격 상승과 식량 위기 속에서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건 쌀을 완벽하게 자급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 농업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도 여전합니다. 전체 농가 중 쌀농사를 짓는 농가가 여전히 50%, 농업소득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도 34%에 달합니다. 생산액도 쌀이 8조4000억원으로 굳건한 1위입니다. 게다가 벼농사는 기계화율이 워낙 높아 육체노동 강도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재배 면적에 따라 정부에서 직불금도 받습니다. 고령화율이 높은 농촌에서 벼농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쌀은 결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심각한 공급과잉입니다. 1998년부터 2020년까지 23년간 쌀 공급과잉이 없었던 해는 딱 두 차례뿐입니다. 공급과잉에 따른 쌀값 하락을 막기 위해 정부는 '시장격리' 제도를 이용합니다. 남아도는 쌀을 시중에서 사들여 창고에 보관했다가 나중에 처분하는 방식입니다.

올해만 해도 정부는 8500억원을 들여 37만t의 쌀을 시장에서 격리했습니다. 그럼에도 쌀값은 계속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쌀값 하락 초기에 충분한 양을 매입했어야 했지만 판단 착오로 세 차례에 걸쳐 나눠 매입하다보니 시장에 미치는 효과가 역부족이었습니다. 정부도 이유는 있습니다. 생산량 예측은 비교적 정확했으나 수요량 예측이 워낙 틀린 탓입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쌀 소비를 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국회가 농민단체 요구를 받아들여 정부의 쌀 시장격리를 의무화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전격 통과시켜 버렸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제 쌀값 하락을 자동으로 막을 수 있으니 잘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시적으로 쌀값 방어가 가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쌀시장 왜곡을 더 심화시켜 결과적으로 그 피해가 농민과 농촌, 농업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초과 공급되는 쌀 전량을 정부가 사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 오랫동안 진행돼온 쌀 생산 조정이 완전히 물 건너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쌀시장의 장기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적정한 수요에 맞게 공급을 조절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러자면 쌀 생산 면적을 줄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최근 2년간 예산당국의 비협조와 농정당국의 안일함으로 실시되지 않았던 생산조정제를 다시 도입해 쌀 대신 다른 작물 재배를 늘리도록 하는 정책적 노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시장격리가 의무화되면 농민들로서는 생산조정제에 참여할 유인이 확 줄어들게 됩니다. 결국 쌀 공급 증가로 가격이 떨어지고, 이어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시장격리에 나서는 악순환이 벌어지게 됩니다.

더 길게는 우리 농업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 농업은 남아도는데도 쌀농사를 계속 짓는 데 자원을 투입하기보다는 부가가치와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농업이 더 강해지고 농민과 농촌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시장격리 의무화가 진정으로 농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인지 자문해봐야 할 때입니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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