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만주 항일분자 중 조선인 무장세력이 가장 악질"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4〉
“만주 가면 10정보의 대지주 돼” 선전
가토의 논조는 흡입력이 있었다. 추종자들이 ‘가토그룹’을 형성했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가토의 주장을 선전했다. “만주이민은 야마토 민족의 민족팽창운동이다. 일본 농촌의 가장 큰 문제인 토지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선전 문구도 요란했다. “만주에 가면 누구나 10정보(町步)의 대지주가 될 수 있다.” 당시 일본 농촌은 문제가 많았다. 여아(女兒) 매매와 일가족 자살, 성병 환자 급증 등 사회문제로 정부가 골머리를 앓을 때였다. 가토그룹의 선전에 현혹되는 것이 당연했다. 1932년 3월, 동북을 점령한 관동군이 만주국을 출범시키자 가토그룹은 만세를 불렀다. 관동군 찬양에 침이 마를 정도였다. ‘만·몽식민사업계획서(滿·蒙植民事業計劃書)’를 출간했다. 내용이 관동군의 극찬을 받고도 남았다.
전직 군인 도미야 가네오(東宮鐵南)가 가토가 제창한 농업이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중국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의 주장이다. 중국은 뿌리가 깊은 나라다. 농업이민으로 중국에 온 일본인들은 중국에 동화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무장이민’을 보내 만주를 개척해야 한다.” 도미야는 자비로 중국유학을 마친 정통파 중국통(中國通)이었다. 1919년, 28세 때 시베리아에서 코사크 기병대와 무장한 농민들의 결속에 감동했다. 7년 후 선양(瀋陽) 독립수비대 중대장 시절, 상관에게 무장이민 구상 설명하다 욕만 바가지로 먹은 경험이 있었다.
중국인, 일 개척단원의 소작농 전락
1932년 9월, 만주국 선포 6개월 후 이시와라의 소개로 가토와 도미야가 펑텐(奉天)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1차 재향군인 이민단의 숫자와 조직, 지역에 합의했다. 조선인 참여는 가토가 제동을 걸었다. “만주의 항일분자 중 가장 악질이 조선인 무장세력이다. 조선 농민은 무지렁이가 아니다. 지배계층보다 보수적이고 민족의식이 강하다. 무장이민에 포함 시킬 경우 조선인 무장조직에 합류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도미야도 수긍했다. 일본 군부는 11개 현(縣)에서 ‘만주개척단’ 명의로 무장이민을 공모했다. 헤이룽장(黑龍江)성 자무스(佳木斯)에 주둔할 소정의 교육과정 이수하고 농업 경험이 있는 신체 건장한 30세 이하의 재향군인 492명을 1차로 선발했다. 편제는 군대식이었다. 대대장(大隊長)과 경비지도원, 농업지도원 외에 군의관도 예비역 중에서 임명했다.
미룽춘은 일본이 만주에 본격적으로 건설한 첫 번째 이민촌이었다. 무장한 일본이민들의 행태는 침략자나 다름없었다. 일전에 암살로 삶을 마감한 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만주국 산업부 차관으로 부임한 후에는 약탈자로 변했다. 아베 덕에 중국인의 토지를 원가의 10% 가격으로 매입했다. 원소유자는 하루아침에 일본 개척단원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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