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270]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

백영옥 소설가 2022. 9. 24. 00: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끔 TV 프로그램에서 쓰레기로 가득 찬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거나, 쌓아놓은 물건이 너무 많아 누울 공간 하나 없이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런 사연은 극심한 악취와 오물 때문에 오래 고통받아 온 이웃의 제보로 알려진다. ‘저장 강박증’이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대개 마음의 불안에서 온다.

저장 강박의 시작은 ‘언젠가는 필요하겠지’라는 마음이다. 스스로도 물건이 많다는 걸 알지만 필요할 때 없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에 물건을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종종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으로 변형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을 잃어버릴까 봐 더 모으는 것이다. 이런 시간이 축적되면 물건의 필요 여부는 더 이상 중요치 않고, 물건을 모으기만 하고,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내게도 ‘저장 강박증’이 있다. 어느 날, 써놓은 원고 파일을 정리해보니 2만개가 넘었다. 대부분 신변잡기 잡문들이지만 숫자를 보니 놀라웠다.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무조건 많이 쓰던 습관이 굳은 것이다. 문제는 많이 써놓기만 했을 뿐, 제대로 정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도 나는 노트북에 글을 쓸 때마다 수없이 저장 버튼을 누른다. 실제 랜섬웨어에 감염된 후, 원고를 두 개의 노트북과 또 다른 외장하드 파일에 따로 저장한다. 문제는 수없이 저장을 했지만 저장한 장소를 잊거나, 저장한 내용을 잊으면 문제의 파일을 다시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당연히 정리되지 않은 정보 역시, 더 이상 정보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모든 사진을 간직했다. 하지만 요즘은 여행 사진을 찍으면 꼭 필요한 사진만 남기고 바로 지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빈곤의 시대와 풍요의 시대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달라진다. 풍요의 시대에 모두를 소유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워야 채워지는 것이다. 인생을 망치는 길 중에 하나가 때때로 비우지 못하고, 계속 채우기만 하는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