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살길이 있다"..제국의 함대를 깨뜨리고 전쟁영웅이 된 남자[윤비의 칼과 펜]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2. 9. 2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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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페르시아 전쟁과 테미스토클레스
빌헬름 폰 카울바흐의 ‘살라미스해전’(1868).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와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영웅으로 떠올랐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라고 이야기했다. 상당히 괴퍅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 철학자는 불과 물, 낮과 밤과 같은 상반된 원리 혹은 힘들 간의 충돌, 밀고 당김이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지배한다고 여겼다. 전쟁은 이런 충돌을 상징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가 오로지 전적으로 형이상학적 사변을 통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에 대해 한 번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흔히 잊는 사실이지만 지극히 추상적인 철학적 학설조차 인간현실의 경험과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집단 간의 폭력행사는 자연재해와 더불어 인간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공동체의 탄생과 성장에서 폭력이 차지하는 역할은 아주 컸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앞부분에서 여기에 대해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비옥한 땅일수록 파쟁이 심했고 파쟁은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성벽을 쌓고 그 뒤에 숨었으며 무기 소지가 일상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과장된 신화(그런 신화는 <300> 같은 할리우드 ‘만화’나 인문교양 강좌에서 종종 접하는, ‘고대 그리스 사람은 이렇게 놀라웠어요, 멋졌어요’ 식의 무비판적 찬양을 통해 계속 재생되고 있다)에 매료된 사람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마 거주민들 사이에 만연한 해적질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다음과 같은 증언일 것이다.

“그들은 성벽도 없이 사실상 여러 마을로 구성된 도시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했는데, (…) 이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영광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 점은 대륙에 거주하는 일부 부족이 해적질에 성공한 것을 오늘날에도 뭔가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옛 시인들도 바다에서 상륙한 자들에게 으레 ‘당신들은 해적이오?’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데, 이는 질문받는 자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질문하는 자들은 그런 행위를 비난받아 마땅한 짓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천병희 역)

만연한 폭력의 기억은 테베의 창건 신화에도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포이니케의 왕자 카드모스는 제우스가 유괴한 여동생 에우로페를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델피에서 신탁을 얻게 된다. 신탁은 카드모스가 암소를 따라가 그 소가 휴식을 취하는 장소에 도시를 세우라고 일러준다. 카드모스가 신탁에 따라 암소를 만나 도시를 세우려 할 때 인근에 자리 잡은 용이 그의 부하들을 모두 죽인다. 카드모스는 용을 쓰러뜨린 후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 용의 이빨을 땅에 뿌린다. 이내 이빨에서 무장한 군사들이 자라나와 두 편으로 나뉘어 마지막에 다섯 명만 남을 때까지 사생결단 싸움을 벌인다. 남은 다섯 명은 싸움을 멈추고 평화를 약속한 후 카드모스를 도와 도시를 건설한다. 이것이 테베이다.

모든 신화는 압축적이다. 실제 한 집단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을 상징화하여 압축해놓은 경우도 많다. 테베의 건설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는 별로 없다. 따라서 테베의 건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복기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테베가 건설되던 과정에서도 혈족과 가문 간, 그리고 외부세력과의 피를 뿜는 투쟁이 있었고 그런 투쟁의 기억이 카드모스의 신화에 압축되어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페르시아전쟁과 살라미스해전

기원전 6세기 말과 5세기 초 새로운 폭력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의 진원지는 폴리스의 내부도 다른 경쟁 폴리스도 아닌 그리스 세계의 바깥이었다. 6세기 말 페르시아는 그리스 북부까지 세력을 떨쳤다. 지금의 튀르키예(터키의 새로운 국명) 서부, 즉 소아시아와 그 연안에 살던 그리스인들도 자연히 페르시아와 이웃하거나 페르시아 관할권의 일부가 되었다.

기원전 6세기 말과 5세기 초, 그리스 세계 바깥에서 몰아친 새로운 폭력의 바람
‘마라톤의 승리’도 잠시, 대군을 이끌고 거침없이 밀려든 페르시아군 앞에 풍전등화같던 아테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반드시 침략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 연재의 첫 편에서도 말했지만 그리스는 어느 모로 보아도 대제국 페르시아에 그리 군침 흘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단한 문화도, 풍요로운 물산도 없었다. 사람들은 거칠었다. 굳이 그리스 사람들이 이름을 날린 분야를 꼽자면 약간의 상업활동에 더해 특히 용병활동이었다. (실제 이집트에는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인 용병들이 거주하는 나우크라티스라는 도시가 있었다.) 아마 페르시아로서는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 자기 세력권 내 그리스인들이 성가셨을 것이고 이를 부추기고 원조하는 본토의 그리스인들에게 짜증 났을 것이다.

페르시아는 문제를 근원에서 정리하기로 했다. 다리우스가 이끌고 들어온 군대는 결국 마라톤전투에서 패배하여 돌아갔다. 제1차 페르시아전쟁이다(기원전 492~490년). 제2차 페르시아전쟁은 10년 후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대군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그리스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스 저자들은 그 수를 100만명에서 400만명까지 잡지만 심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당시의 교통과 보급, 통신을 감안할 때 그 정도 규모의 군대를 그리스로 출병시키는 것은 대제국 페르시아에도 불가능했다.

동원된 군대, 특히 적군의 수를 늘려잡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전쟁 이야기의 양념 같은 것이다.) 테르모필라이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군대는 수적으로 우월한 페르시아군에 압도당했다. 테르모필라이에서 페르시아의 육군을,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페르시아의 해군을 저지하려던 그리스 연합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스 본토로 쏟아져 들어온 페르시아군은 보이오티아 지방을 휩쓸었다. 보이오티아로부터 아테네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아테네인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기존 정치엘리트의 틀을 깨고 하층민의 지지를 받고 급부상한 테미스토클레스
신탁까지 동원해 함대를 키워낸 그는 ‘살라미스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해상강국의 지배자가 된다
그러나 다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귀족들과의 투쟁…그에겐 또 한 번의 반전이 필요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4~459년)가 부상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여러모로 기존 정치엘리트의 틀에서 벗어나는 사람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출신상 정치지도자가 되기에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르카나니아 사람이었다. 순혈 아테네인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클레이스테네스가 모든 자유민을 아테네 시민으로 삼도록 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는 참정권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귀족 자제들이 거쳐가는 교육도 받지 못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 아버지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로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93년 아르콘(최고 행정직) 자리에 올랐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일반 시민, 그중에서도 하층민들에게서 특히 지지를 받았으리라는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처음부터 바다에 자신의 정치적 명운을 걸었다. 바다에서만 싸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마라톤전투에도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쌓은 명성은 모두가 바다와 해군에 기대고 있었다.

에발트 한젠이 그린 테미스토클레스(1875년)

그가 처음 주목받은 것은 서부 그리스의 해상강국 코르키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동시에 해적소탕작전에 성공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아테네의 해상통로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페이라이에우스 항구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라우리온 은광에서 새로 거두어 들이는 수입으로 483년에는 200척 규모로까지 함대를 키우도록 시민들을 설득했다. (실제로는 100척만 건조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해군건설에 적극적이었던 것을 두고 사람들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것만으로 설명이 안 된다. 그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페르시아가 아니라) 아테네인들이 라이벌로 여겨온 남쪽의 섬, 아이기나를 견제할 필요성이었다. 동시에 그는 해군의 확장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그의 권력 기반은 일반시민, 그중에서도 하층민들이었다. 당시 해군의 전투방식은 매우 노동집약적이었다. 함대를 기동하기 위해서 상당한 수의 노잡이들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랬다. 해군을 키운다는 것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잡이들은 하층민을 포함한 일반시민들에서 충당되었다.

테르모필라이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아테네인들이 우왕좌왕할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바다에 살길이 있다고 설득했다. 페르시아와 해전으로 결판을 내자는 이야기였다. 물론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바다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는 것은 육지에서 전투를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 즉 도시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흔쾌히 선택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페르시아 해군이 뚜렷하게 약체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은 더 꺼림직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1000척이 넘는 삼단노선에 3000척가량의 보조선을 합해 4000척 이상을 페르시아군이 끌고왔다고 하지만 이는 과장일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테미스토클레스는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신탁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페르시아군의 접근에 겁먹은 시민들에게 델피에서 나무로 만든 성벽에 몸을 맡기라는 신탁이 도착한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의아해하는 시민들에게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로 만든 성벽이란 곧 배를 의미한다고 설득한다.

결국 아테네 시민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에 따라 페르시아와의 해전을 준비한다. 그렇게 벌어진 해전은 살라미스해전(기원전 480년)으로 알려져 있다. 살라미스는 좁은 해협이었다. 많은 수의 배가 한꺼번에 기동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페르시아 해군은 수적 우위가 주는 장점을 백분 활용할 수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페르시아 해군은 반원을 그리며 그리스 해군을 포위하려 했지만 좁은 지형 안에서 배들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긴 싸움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다. 페르시아군은 썰물처럼 그리스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스파르타가 더 이상 홀로 지배하지 않는 그리스 세계가 열렸다. 고대 그리스 역사의 새로운 단락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살라미스 이후

살라미스 전투의 승리는 두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한 운명은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이었다. 그는 이 전투를 통해 아테네의 전쟁영웅으로 떠올랐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전투 이듬해 플라타이아이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잔존 부대를 격파함으로써 자신의 군사적, 정치적 지위를 더욱 굳혔다.

또 다른 운명은 아테네였다. 이제 아테네는 최강해군을 거느린 해상강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테네는 에게해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아울러 델로스동맹이라는 강력한 권력블록을 건설하고 스파르타와 그리스 세계를 반분하게 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그의 시대는 아네테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페르시아전쟁은 아테네에 위기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 위기를 겪는 가운데 아테네는 그리스의 최강국으로 탈바꿈했다.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인물을 빼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라는 말은 아테네 내부정치에도 해당된다. 전쟁과 더불어 아테네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전쟁은 하층을 포함한 일반시민들의 힘을 키웠다. 그러나 <아테네 국가>는 살라미스해전을 거치면서 아레오파고스 귀족회의도 원래의 인기와 영향력을 회복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배를 건설할 비용을 비롯하여 엄청난 전쟁비용이 부자들, 귀족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이 연재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 그리스 폴리스는 주고받는 셈법이 확실한 사회였다. 많이 기여한 자가 많이 갖는다.

이러한 상황이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달가울 수는 없었다. 그는 그냥 아테네의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귀족과 평민들로 분열된 아테네의 정치지도자였으며, 그것도 평민들을 자기세력의 기반으로 삼는 지도자였다. 살라미스해전에서 그랬듯 또 한 번의 반전이 필요했다. 아테네는 또 한 번의 투쟁을 예감하고 있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한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이론을 역사 및 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을 강의하였다. 가르친다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산다. 2021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독일에서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2018~2020년 한겨레 신문에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를 연재하였고, EBS <지식의 기쁨> <세바시> 등에서 강연하였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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