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게트 속에 크림 넣기, 절대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정희 입력 2022. 9. 23. 21:03 수정 2022. 9. 2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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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모레 육십, 독립선언서] 오로지 빵에 집중하는 시간

인생의 새로운 길에 섰습니다. 늘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살아온 삶을 마무리하고, 이제 온전히 '내 자신'을 향한 길을 향해 가보려 합니다. <기자말>

[이정희 기자]

열 시가 되어갈 즈음,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거부터 해도 될까요?"
"아직 빵이 굳지 않았는데..."

여기서 '이거'는 '연유 바게트'를 말한다. 바게트를 구워, 칼집을 낸 사이로 연유 크림을 바른 빵이다. 기사님이 바게트를 구워주시면 내가 칼집을 내서 크림을 바른다. 그런데 매일 열 시쯤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늘 그 시간이면 이 빵을 찾는 손님이 오시기 때문이다.

크림이 뭐길래
 
 크림 바게트빵
ⓒ 픽사베이
손님이 오시기 전에 빵을 '완성'하면 좋겠지만 빵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하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기사님이 출근해서 생지를 해동시키고, 굽고, 다시 빵칼로 자를 수 있을 정도로 굳은 다음에야 크림을 넣을 수 있다.

전에 급한 마음에 '모카 크림 식빵'에 서둘러 크림을 넣으려 했는데, 크림이 아직 따뜻한 빵에 닿으니 흘러내려버렸다. 하루가 지나고 텅 빈 매대를 빵으로 빨리 채우기 위해서는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아래 위층에서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그럼에도 빵은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 매어 못쓰듯 순서에 맞는 '시간'을 요구한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다 아래층 '언니'가 헐레벌떡 뛰어올라오신다. '고수'인 언니는 이제는 제법 마른 바게트를 썩썩 잘라 순식간에 듬뿍 크림을 넣는다. 그러면서 덧붙이신다. 하루 걸러 오는 손님 왈, 최근 들어 어쩐지 바게트에 든 크림이 점점 줄어드는 거 같다고. 그러시면서 바게트를 조금 더 사선으로 자르면 크림 넣을 공간이 더 생길 거라는 말씀을 남기시고는 바람처럼 사라지신다.

안그래도 처음 크림빵을 완성했을 때 사장님이 '손수' 빵을 들고 오셔서 묵직할 정도로 '크림'을 넣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바 있다. 오랜 단골들이 많은 가게답게 빵에 넣는 크림을 아끼지 않는데, 아직도 난 '듬뿍'과 '애걔~' 사이에서 갈짓자 걸음이다.

빵에 크림 넣기, 그냥 넣으면 되지 하겠지만 그것 참 쉽지 않다. 처음 일을 배울 때 '고수' 언니가 본을 보여주셨다. 비닐 튜브에 든 크림을 한 손으로 쥐고? 그런데 그 '한 손으로 쥐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당연히 평소에 많이 쓰는 엄지와 집게 손가락을 이용해서 쥐어 보려고 하는데, 어쩐지 힘이 안 들어 간다. 언니는 그렇게 하면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손목에 무리가 간다며 손 전체를 이용하라고 하셨다. 한 주먹으로 비닐 튜브를 쥐는데, 겨우 '쥐오줌'만큼 크림이 나온다.

"넌 그 나이먹도록 손아귀 힘도 없니?" 

그르게, 손아귀 힘도 기르지 못하고 뭐했을까? 걸레라도 열심히 짤 걸! 어찌어찌 언니가 가르쳐주는 대로 주먹을 쥐고 크림을 넣어보는데, 도무지 힘이 안 들어간다. 빨리 넣어서 아래층으로 내려보내야 하는데 '하세월'이다. 쓰지 않던 손근육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게 꼭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보려 하지만 아직 버벅거리는 내 모습같기도 하다. 결국 나는 '손아귀 힘' 대신, 비닐 튜브를 조금 더 넉넉하게 자르는 것으로 '난국'을 돌파해 가는 중이다.

하지만 무조건 구멍을 크게 자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연유 바게트의 경우 자른 틈이 넓지 않아 크림을 넣다보면 옆으로 삐죽삐죽, 모양새가 고약해지기가 십상이다. 내 딴엔 머리를 쓴다고 '스프레드 나이프'로 펴발랐다가 '혹 떼려다 혹붙인 격'으로 된통 야단을 맞았다. 손에 힘 조절만 제대로 하면 대번에 넣을 과정을 제대로 '숙련'치 않고 잔꾀를 부린 셈이 된 것이다. 

크림 넣기와 서예의 공통점? 

숙련되신 '언니'나, 기사님이 넣은 크림은 '예술'이다. 층층이 레이스같달까? 잘 다듬어진 녹차밭 능선같달까. 골똘히 크림을 넣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라인별로 크림이 무너지지 않게 넣는 '일필휘지', 예전 서예에서 배운 '필법'이다.
 
 해서 한 일자, 잠두마제
ⓒ 경산청림서예원 유튜브 화면 캡처
잠두마제(蠶頭馬蹄), 서예를 처음 시작하면 주구장창 한 일자 가로획만 긋는다. 누에 머리처럼 붓을 살포시 내리 눌러 시작해서 말굽처럼 마무리해야 한다. 하지만 힘조절을 제대로 못하면 말굽은커녕 오리발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저 한 일자 한 획을 긋는 건데, 몇 장을 내리 그어봐도 다 제각각, 누에와 말굽 사이에서 길을 잃기가 십상이었다. 그 간단한 획을 하나 긋는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의 호흡은 정갈해야 하고, 정신을 집중해서 힘을 너무 들이거나 빼지 않아야 했다. 묘하게도 마음이 앞서거나 생각이 딴 곳으로 흐르면 글씨가 흔들렸다.

바로 그 '서예'를 하던 그 시절의 '감각'이 묘하게도 크림을 넣는 그 순간에 '오버랩'됐다. 서예와 크림 넣기, 빵에 크림 한번 넣으면서 너무 거창하다고? 어디 '서예'의 도를 크림에다 비교할 거냐고? 아니, 그 시절의 붓의 농담에 애를 쓰던 그 마음이 지금 내가 크림을 넣는 이 순간과 더하고 덜하고 차이가 있을까 싶다.

늘 빵을 만드는 걸 가르쳐 주면서 '언니'는 사람들이 먹는 거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단골이 대번에 크림의 내용이 바뀐 걸 알아차리듯이, 그 사소한 듯한 크림의 양에 먹는 이들의 마음이 오갈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이곳에 오래도록 터전을 잡고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빵집'이 될 때까지는 아마도 사람들이 먹는 거에 '장난'치지 않고 '진심'을 다하는 마음들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진심'을 더하는 일에 '알바'라고 해서 책임이 다르지 않다. 

서예를 배울 때 온전히 두어 시간 붓의 농담에 마음을 쏟고 나면 '수련'을 마치고 난 듯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빵을 만드는 시간도 다르지 않은 듯싶다. 손에 힘을 집중해서 가지런하게 그리고 골고루 크림을 넣고나서 그 묵직한 느낌이 내 손에 전해지면 뿌듯하다.

다 넣은 한 종류 열 개의 빵을 냉판에 올려 가져갈 때는 내 새끼 보는 듯 흐뭇하다. 물론, 여전히 손힘 조절을 못해 뭉텅, 혹은 질질거리기도 하지만, 그 순간만은 잡념없이 오로지 빵에 집중하고 나면, 예전 벼루에 붓을 내려놓을 때와 비슷한 '자족감'을 맛보게 된다. 

마음 다스림에 대한 갖가지 처방들은 늘 '지금 여기'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막상 그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서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산책도 하고, 음악도 듣고, 운동도 하라는 '팁'들이 등장한다. 몇 시간이고 길을 걷고, 좋은 음악을 듣고, 필라테스나 요가를 하던 시간들, 하지만 여전히 내공이 부족했는지 마음이 어수선했다.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빵집 알바'의 시간, 우선 매달 돈이 들어오니 좋았다. 그리고 돈과 함께, 비록 하루 네 시간여지만 흐트러짐을 허용되지 않는 집중의 시간들이 어수선했던 내 마음을 한결 가뿐하게 만들어 갔다. 내 몸을 움직여 일구어 내는 그 단순한 삶의 방식이 내게 주는 '보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https://brunch.co.kr/@5252-jh)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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