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격식 중시하고 즉흥언행 삼가고..2만여회 공식행사로 이뤄낸 '탁월한 국가원수'[전희상의 런던 책갈피]
우리 시대의 여왕
로버트 하드만
넷플릭스의 <더 크라운> 시리즈를 재밌게 시청한 분들에게 로버트 하드만이 쓴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 <우리 시대의 여왕>을 권하고 싶다. 익숙한 등장인물과 스토리 덕분에 지루함의 덫에 빠질 위험이 적고, 흥미 있는 일화를 많이 담고 있어 드라마를 보듯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 <더 크라운>이 위기와 갈등 속에서 고뇌하고 허둥대는 여왕을 그린다면 <우리 시대의 여왕> 속 엘리자베스 2세는 무엇보다 탁월한 국가원수이다. 그의 탁월함은 뛰어난 비전이나 전략, 아니면 비범한 카리스마 같은 개인적 능력과는 무관했다. 그것은 재위 70년간 꾸준히 이어진 2만여회의 공식행사의 부산물이었다.
여왕은 공식행사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대했다. 의전과 격식을 중시했고 감정표현과 즉흥적인 언행을 삼갔다. “내가 눈물을 흘린다고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동시에 실수에는 관대했고 대화 상대방을 겸손하고 편안하게 대하는 훌륭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공식행사를 통해 군주의 모습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여겼다. 군주의 자리를 “믿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아야 한다”라는 것이 그의 오랜 철칙이었다. “감사를 전해야 할 사람에게 감사를 전하고 방문해야 할 곳에 방문하는 것.” 언뜻 보기에는 단순하고 평범한 일이다. 하지만 단순함과 평범함에 온몸을 던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흔히 영국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면적인 시각인 것 같다. 여왕 서거 후 10일간 계속된 국가 애도 기간 동안 언론에는 “연속(continuity)” “불변(constant)” 같은 단어들이 많이 등장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지는 영속적 가치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 ‘불변’의 자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도전과 위기 속에서 매번 꾸준히 갱신되어온 그러한 자리였음을 각별히 살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여왕의 성취는 영국이 그 국력을 넘어서는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매년 해외 순방을 통해 영연방 국가들과의 결속을 다졌고 정부의 요청이 있을 때는 독재자를 버킹엄궁으로 초청해 만찬을 베푸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현안에 개입하는 것은 철저히 피했지만 처칠을 필두로 15명의 영국 총리, 13명의 미국 대통령을 상대한 관록을 바탕으로 많은 세계 지도자들을 매료시켰다.
키신저는 모든 사회가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비전 사이를 부단히 오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미지의 세계로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는 지도자는 그의 비전을 과거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그 과거의 기억을 단단히 다지는 것을 신성한 책무로 삼은 엘리자베스 2세와 같은 지도자가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여왕의 빛나는 성과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같은 영국의 과오를 덮을 수는 없다. 생전에 대영제국의 범죄에 대한 속죄와 단절의 의미로 군주제를 폐지하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여왕은 그러한 미래의 새로운 영국을 위한 초석을 다지고 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희상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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