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간 쓴 '그루밍 성범죄'의 적나라한 진실[책과삶]

김종목 기자 입력 2022. 9. 23. 15:09 수정 2022. 9. 23. 19:1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에 '롤리타' 읽고 소녀들 슬픔과 절망 공감
'성적 대상화' 문화 원형, 세상 속에 어떻게 뿌리박힌지 알게돼
'좋은 희생자' 만들지 않으려 광범위한 연구, 다양한 학대 묘사
마이 다크 버네사

마이 다크 버네사

케이트 엘리자베스 러셀 지음 |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544쪽 | 1만7000원 

열다섯 살 버네사 와이들은 2000년 명문 사립 기숙학교인 브로윅으로 전학 간다. 이 학교 문학 교사 제이컵 스트레인과 친해진다. 제이컵이 먼저 접근한다. 그는 마흔두 살이다. 버네사가 시 쓰기를 좋아하고, 외롭다는 점을 이용한다. 그가 수업 시간 버네사에게 건넨 말은 “거기(버네사의 고향)서 가끔 외로울 때도 있나요”였다.

교사·학생 간 위계 속에서 친절함과 교묘함을 뒤섞은 언행으로 버네사의 마음을 교란한다. 학교 여러 공간에서 둘만 남았을 때 “네 작품을 좀 읽어보고 싶구나” “뭐가 속상한지 물어봐도 될까” 같은 말로 환심을 사려 한다.

버네사의 붉은 머리를 단풍잎 빛깔에 비유하며 칭찬한다. 버네사의 엄마는 나중에 이 말을 듣고 “열다섯 살 여자애한테 하는 말치곤 좀 이상하잖아”라고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버네사의 거짓말과 부인으로 둘의 관계는 드러나지 않는다.

제이컵은 그루밍의 수위와 강도를 높여간다. 관계 여부의 결정권은 버네사에게 있는 듯한 말도 주입한다. “마침내 영혼의 짝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열다섯 살이라니” 같은 말이다. “네가 훗날 돌이켜보면서 즐겁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 가엾게도 너와 사랑에 빠졌지만 너에게 손을 대지 않았던, 결국 좋은 사람이었던 웃기는 늙은 선생님” 같은 말로 의도를 숨긴다. 수시로 “사랑한다”는 말로 버네사의 마음을 파고든다. 신체 접촉이나 성교를 할 때도 버네사의 허락을 구하는 식이었다.

실비아 플러스의 시집 <에어리얼>을 버네사에게 건넨다. 시 ‘레이디 나사’의 “재 속에서/ 나는 붉은 머리카락으로 일어나/ 공기를 들이마시듯 남자들을 잡아먹는다”를 두고 “이 구절을 보면 네 생각이 나”라고 말한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 중 “숭배받고 애무받는, 나의 검은 버네사” 구절도 알려준다. 붉은제독나비의 학명이 버네사 아탈란타이다. 또 하나 건넨 책이 나보코프의 <롤리타>다. 자신을 험버트 험버트, 버네사를 돌로레스 헤이즈에 대입한 것이다. 명백한 성적 대상화의 목적을 드러낸 범죄적 욕망이었다. 제이컵이 버네사에게 이 책을 주며 한 말은 “혹시 읽다가 누구한테든 들키면, 내가 준 거 아니다”였다.

피해자 버네사는 그루밍 의도를 자각하지 못한다. <롤리타>를 받고는 “비로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되고, 그가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일지 새롭게 깨닫는다”고 여긴다. 험버트가 ‘님펫’의 신비로움을 묘사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 역시 자신이 지닌 불가사의한 능력을 의식하지 못한다” 같은 대목을 버네사 자신에게 대입한다. 버네사는 늘 자신이 “(제이컵이 지닌) 중년 남자의 신중함을, 그의 느린 구애를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버네사가 대학에 입학하고, 호텔에 취직하기까지 17년 세월에 걸쳐 이어진다. 이 관계의 균열은 브로윅을 다녔던 테일러 버치가 열네 살 때인 2006년 제이컵에게 성폭력과 학대를 당했다는 내용의 고발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2017년 올리면서 시작된다. 버네사는 이때만 해도 제이컵과 통화하며 “괜찮아요?”라고 묻는다. 테일러가 피해 의식에 취해 거짓말한 것이라고 말해주길 바란다. 버네사는 온갖 감정의 고통에 휘말리면서도 “그 사람은 날 학대하지 않았어”라며 제이컵이 자신에게 저지른 범죄를 부인한다. 버네사는 “그 시간에 묶여”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사립학교 장기근속 교사, 성적 학대 혐의 추가 폭로에 정직 처분”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피해자가 여덟 명으로 늘었다. 다 미성년일 때 제이컵에서 성범죄를 당했다. 브로윅에서 났던 소문과 버네사의 블로그 글을 본 기자가 버네사에게도 인터뷰를 요청한다. 테일러가 버네사를 찾아와 폭로를 호소한다.

버네사는 아버지가 죽고 만난 정신과 의사 루비와 대화하며 점점 범죄에 대해 자각한다. 애초 몰랐던 건 아니다. 처음 섹스할 때 강요당한 기분과 구역질을 느끼고, 오로지 집에 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으나 어떤 말도 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걸 떠올린다. “그에게 이끌렸던 나는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이였다. 소아성애자의 손에 자신을 기꺼이 바친 아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괴롭혔다. “독이 퍼진 부분을 잘라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며 자신을 억압한다.

자학, 자괴, 죄책감도 제이컵이 조성하고 강요한 것이다. 두 사람 관계가 소문나자 제이컵은 “들키는 날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 네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침묵을 강요한다. “물론 내가 해고되는 건 거의 확실해. 하지만 너도 짐을 싸야 할 거야. 그런 스캔들이 터지면 브로윅은 네가 여기 있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그는 부모가 있다는 버네사의 말에도 “주정부는 자식을 성도착자와 어울리도록 방치하는 부모를 좋아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들은 날 그렇게 볼 거거든”이라고 답한다. 학교 조사를 받을 때도 “네 이름과 사진이 신문에 날 거야” “뉴스도 온통 네 얘기일 거고” “이 일이 영원히 널 따라다니겠지. 평생 낙인이 찍히는 거야”라며 겁박한다. 버네사는 “진실이 밝혀지고 나면, 그가 나의 삶 전체를 정의하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진 다른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며 다시 자신을 억압한다. 버네사를 겁먹게 한 건 “진실의 거대함과 적나라함”이었다.

케이트 엘리자베스 러셀의 이 첫 소설은 출간되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논쟁적 작품으로 떠올랐다. 제이컵에 대한 버네사의 옹호와 감정 표현, 그루밍의 상세한 묘사 같은 것이다. 로맨틱하게 비칠 여지도 조금은 있다.

이 소설의 뜻은 분명하다. 러셀은 루비의 “버네사는 그가 한 짓이 폭로되면 그가 견디지 못하리란 걸 알았고 그래서 책임을 뒤집어썼잖아요” 같은 대사로 제이컵의 범죄 행위의 문제를 환기한다. “우리의 무력함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다. 누가 우리를 믿었겠는가?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가졌겠는가?”라는 버네사의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러셀은 미투 이후 벌어지는 여러 2차 가해 상황을 넣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정적으로 풍부한” 10대 소녀들의 말은 신빙성이 없다는 여론도 일어난다. “이제는 무모한 혐의 제기의 위험성을 논할 때” 같은 기사가 이어진다. 피해자이자 고발자인 테일러는 냉혹한 사람으로 몰리며 강간과 살해 협박 등을 받는다. 팟캐스트 한 진행자는 “페미니즘의 횡포”라고 비난한다. 브로윅은 이 사건 조사 결과를 “진실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불가사의한 언어”를 사용해 발표한다. “성적인 측면에서 부적절한 행위가 있었을지언정, 조사 결과 성적 학대 행위와 관련한 신뢰할 만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러셀은 2020년 3월 가디언과 인터뷰하면서 “버네사를 ‘좋은 희생자’로 만들지 않으려 했다”면서도 “(광범위한 자료 연구를 한 뒤) 가능한 한 다양한 형태의 학대 묘사로 (이 문제에) 관여하고, 활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열네 살일 때 <롤리타>를 읽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도 나는 롤리타의 슬픔과 절망을 스치듯 봤다. 내가 사는 세상에 (소녀를 성적 대상화하는) 문화 원형들이 어떻게 뿌리박힌지도 깨달았다”고 했다.

케이트 엘리자베스 러셀은 그루밍 피해자의 고통과 가해자의 심리적 지배력 문제를 다룬다. <롤리타>에 원형을 둔 성적 대상화 문제, 미투 이후 2차 가해 문제 같은 현실도 반영했다. ⓒElena Seibert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