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20) 오이란

2022. 9. 23. 05: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에도시대 유곽의 여왕
거금 줘도 품을수 없어

01010101101.20220923.001349351.02.jpg


허수아비 천황은 일본 교토에 처박혀 숨을 죽이고 사무라이를 앞세운 군벌 토호들은 전쟁에 여념이 없었다. 일본 열도에 피가 튀겼다. 1615년 여름, 마침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 진영을 섬멸하고 전국을 통일, 평화로운 번영의 에도시대를 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가 자리 잡은 에도는 바로 지금의 도쿄다.

오랜만에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오자 전장에 나갔던 사무라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호미를 잡고 대장간엔 풀무질이 끊이지 않았다. 장사꾼들은 우마차에 상품을 싣고 부지런히 쏘다녔다. 일본이 흥청거리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던 전시의 제도·법령·풍습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유곽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둠살이 내리면 이 골목 저 골목마다 붉은 등불 아래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고 유카타만 걸친 채 엉덩이를 흔드는 창부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유곽이 막부를 둘러싸다시피한 모습도 볼썽사나웠다.

그때 교토에서 돌아온 쇼지 진에몬이라는 사람이 막부를 찾아와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을 한다. 아예 외딴곳에 공창을 만들어 창부를 통제할 테니 허가를 내달라는 것이다. 막부 관리들도 간절히 바라던 바다. 갈대가 무성한 에도 변방 니혼바시에 토목공사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이곳에 ‘요시와라’라는 공창이 들어섰다. 창부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흔히 유곽 하면 음습하고 불량배가 설치는 뒷골목을 연상하지만 요시와라는 달랐다. 음식점·옷가게·술집·화과자집, 그리고 주택도 들어섰다. 초대형 고급 상권이 모여 불야성을 이뤘다. 재력가와 권력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남철처럼 달라붙어 밀담을 나누기 마련이다. 그들을 붙여주는 접착제에 술과 여자가 빠질 수 없다. ‘오이란’이 생겨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이란은 무엇이냐. 재력가가 청탁을 하려고 막부의 실력자를 불러 술상에 앉힐 때 그저 그런 창부를 옆에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예쁘고 우아하며 고상하고 지적인,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함을 지녀 막부 우두머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여인을 불러야 한다. 그런 창부가 바로 오이란이다.

18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오이란은 요시와라의 여왕이다. 화대를 많이 준다고 오이란을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오이란을 대면하는 절차가 여간 복잡하고 까다로운 게 아니다.

오이란은 엄격한 법도 아래 귀족들만 상대했다. 귀족이나 무사들이 요시와라에 가는 것은 체면이 구겨진다 해서 심부름꾼 주선으로 찻집에서 만났다. 오이란이 가는 찻집은 이층에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기이한 것은 오이란이 상석에 앉고 손님인 귀족 남자는 아랫자리에 앉는 것이다. ‘밖에서는 너희가 귀족이지만 여기 요시와라에선 내가 여왕이야’라는 무언의 선언인 셈이다.

첫 대면엔 아무 말 없이 술 한잔만 하고 헤어진다. 오이란이 귀족 남자를 찬찬히 뜯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퇴짜를 놔 더 만나지 않는다. 두번째 만남도 첫번째와 같은 절차를 밟지만 동침은 하지 않는다. 세번째 만남에서 남자가 오이란 마음에 들면 연회장으로 가게 된다. 이때 오이란이 연회장으로 가는 행렬, ‘오이란도추’가 이동하는 길에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오이란의 나막신은 높이가 20㎝요, 첩첩이 껴입은 옷 무게만도 30㎏, 틀어 올린 머리에 꽂은 비녀가 수십개다. 일어서기도 벅차니 이상한 걸음으로 오이란도추를 거느리고 요시와라 거리를 걸어가면 오이란은 바로 여왕이 되는 것이다. 수십명에게 둘러싸여 뒤로는 수습생들이 시녀처럼 화려한 복장으로 따라가면 연도에 입추의 여지 없이 늘어선 구경꾼들은 숨을 죽이고 넋이 빠진다. 귀족 마님마저 오이란 머리 모양과 화려한 옷을 따라 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연회장에서 오이란을 기다리는 귀족 남자는 재력을 과시하고자 산해진미를 차리고 악기를 든 수많은 게이샤를 대기시켜놓는다. 게이샤는 창부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다루는 예인(藝人)으로 몸을 파는 것은 엄격히 법으로 금지됐다. 여기까지 남자 손님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지금 시세로 약 2000만원,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거금의 화대가 필요했다.

그러나 ‘오이란은 거부가 되겠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아무리 여왕이라도 유곽에 팔려 온 몸이다. 병이 들거나 몸에 상처라도 나면 조기 은퇴한다. 순탄해도 스물일곱살이 되면 유곽에서 떠밀려 거리에 내팽개쳐진다. 행인에게 구걸하는 밑바닥 신세가 된다.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