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섬광처럼 스쳐가는 순간을 포착한 스냅샷

한겨레 2022. 9. 2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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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진의 단편 '우산은 하나로 충분해'는 쇼핑몰에 들어가 옷을 고르는 여성의 모습을 조명하며 시작한다.

여성은 옷을 고르면서 전화통화를 하는데, 통화 상대와 크고 작은 신경전을 벌인다.

주위 사람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여성이 통화하는 상대가 '엄마'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엄마와 딸 사이의 통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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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의 책들 사이로]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해피엔딩 말고 다행한 엔딩
황현진 지음 l 문학동네(2021)

황현진의 단편 ‘우산은 하나로 충분해’는 쇼핑몰에 들어가 옷을 고르는 여성의 모습을 조명하며 시작한다. 여성은 옷을 고르면서 전화통화를 하는데, 통화 상대와 크고 작은 신경전을 벌인다. 주위 사람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여성이 통화하는 상대가 ‘엄마’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엄마와 딸 사이의 통화’이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그렇기에 미리 화가 나며,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화를 참지 못하는, 그렇게 화를 내버린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더욱 화를 내게 되는 그런 통화. 이는 통화 상대인 ‘엄마’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엄마’는 딸의 반응을 예상하고 그에 대비한 대답을 내놓는 것으로 전형적인 통화 내용이 더욱더 전형성을 띠도록 한다.

모녀는 왜 그런 통화를 하게 됐을까. 소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기보다, 통화의 내용을 들려주고, 그 통화의 분위기에 매몰된 여성이 실수를 하고, 그 결과 커다란 곤경에 빠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상에 흔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지지만, 여성은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때우려 한다. 엄마에게조차 자초지종을 털어놓지 않고, 그저 혼자서 순간을 모면하려 들며, 그 결과 위태위태한 장면을 연출한다.

보여주기만 할 뿐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짧은 텍스트이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는 면에서, 단편소설의 모범을 보여주는 듯한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메시지의 확실한 전달에 성공하는데, 그것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양각으로 돌출시키기보다, 음각으로 덜어내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엄마’는 시종일관 망설이고,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딸이 누군가와 의사소통하는 데 불쑥 끼어들어 의견을 던져넣는다. 우산을 두 개 달라고 요청하는 딸에 맞서 ‘우선은 하나면 충분하다’고 끼어드는 식으로. 그에 대처하는 딸의 모습도 엄마와 닮아 있다. 직접적으로 터놓고 제 의견이나 감정을 말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화가 나서 미칠 지경임을 은근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모녀 사이의 의뭉스러운 소통방식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소설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다른 인물들을 생각하게 된다. 여성의 아버지나 애인 같은, 두 여성이 지금의 모습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을 인물들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이 시와 소설만큼이나 다른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잘 짜인 단편소설과 만나면 이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장편소설이 총체적이고 깊이 있게 한 세계를 보여준다면, 단편소설은 우리 생의 한 찰나를 포착해 선명히 형상화해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우리 삶을 이루는 수많은 일상의 한 단면이 뚝 잘라 담겨 있다.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도, 인물들을 설명하는 서술도,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이, 그저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소설이 끝날 즈음엔 작가가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가 강렬하게 전달되어 온다. 섬광처럼 스쳐가는 순간을 포착해 스냅샷으로 보여주고 쓰이지 않은 존재를 생각하게 하는 힘. 그것은 단편소설이 가진 고유의 미학이다.

정아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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