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덕업일치' 축복 누리는 역사 번역 전문가랍니다

한겨레 2022. 9. 2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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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Book] 번역가를 찾아서]번역가를 찾아서│최파일 번역가
역사 덕후·셜록 덕후 최파일
"역사, 딱히 쓸모없어 더 매력적"
시대적 맥락 설명 등의 고충도
지난 12일 서울 영등포동 자택에서 만난 역사서 전문 번역가인 최파일씨.

최파일 번역가가 역사서만 번역하는 까닭은 그가 유구한 “역덕(역사 마니아)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역사‧세계사 교과서를 받는 즉시 다 읽었다거나 “교과서 속 연표를 외는 게 참 재미있었다”는 고백은 소소한 징후라 할 것이다. 그는 한때 기자를 꿈꾸며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에 입학했으나, 서양사 교양수업을 한 과목 신청했다가 역덕의 정체성이 만개하는 바람에 서양사학과 복수전공을 감행해, “독일어 역사서 강독 수업을 위해 과외수업을 받는 등 주객전도의 대장정” 끝에 기어이 서양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2010년 <십자가 초승달 동맹>(이언 아몬드, 미지북스)을 출간하며 전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선 뒤에는 매일 8시간 넘게 오로지 역사서 번역 한길만 걷고 있다. 한편으론 “그간 끊임없이 수집한 역사서들을 소화하기 위해” 주변 역덕들과 독서모임 ‘헤로도토스 클럽’을 결성해 10년째 운영 중이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배경으로 한 10여 년간의 견문록 <역사>를 집필한 이다.

“모임을 꾸리던 2012년 10월에 에릭 홉스봄의 부고 기사를 봤어요. 홉스봄의 시대 3부작인 <제국의 시대>, <자본의 시대>, <혁명의 시대>(한길사, 1998)로 모임을 시작했죠. 10여 명의 회원들이 한 달에 한 권씩, 집에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을 함께 읽기로 했는데 다들 역사책을 좋아하다 보니 자꾸만 신간을 사게 돼요(웃음).” 헤로도토스 클럽 내에서 최파일 번역가와 다른 두 명의 회원이 의기투합해 “고전 오브 고전”을 읽는 소모임 ‘투키디데스 클럽’을 만들기도 했는데 “키스 토머스의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전 3권을 읽은 다음 장렬히 전사해 지금은 활동중지 상태”라고 한다. 다만, “뜻있는 역덕이 있다면 언제든 부활시키고 싶다”며 지면을 빌려 ‘덕업상권(덕질을 서로 권함)’의 희망을 피력했다.

덕과 업이 일치하는 축복받은 이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다. 역사서 전문 번역가의 가장 큰 고민은 “영어권 독자들도 지금은 잘 모르는 단어나 역사적 사실을 가급적 간략한 역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어 radicals는 보통 ‘급진주의자’로 번역하지만, 19세기 맥락에서는 ‘남성보통선거권 옹호자’를 뜻한다. 19세기 서양을 다룬 역사서를 옮기는 번역가는 “독자들이 시대적 맥락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아니면 역자가 나서서 설명해줘야 할지” 고민이 되고, 이를 알기 쉬우면서도 간결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소문난 ‘역사덕후’이자 ‘셜록 홈스 덕후’인 최파일 번역가가 본인이 소장 중인 438권의 셜록 홈스 관련서를 소개하고 있다.
지난 12일 서울 문래동 자택에서 만난 역사서 전문 번역가인 최파일씨.

역사서에 빈번히 등장하는 ‘인용문’ 번역도 난제다. 당대의 사가들은 지식인 독자들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쯤은 너끈하다고 여겼으므로, 원문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해당 외국어에 능통한 지인들에게 일일이 자문을 구해야 한다. 시대별로 서로 다른 민족이나 왕국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의 이름을 현재의 지명으로 통일해 소개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역사를 왜곡하거나 독자에게 혼란을 주게되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 예를 들면 “우크라이나의 르비우는 폴란드 지배 당시엔 르부프, 오스트리아제국일 땐 독일어로 렘베르크라 불렸는데, 현재 이름을 그대로 살려쓰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시작되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18세기나 17세기로 당기는 셈”이 된다.

한편, 최파일 번역가는 셜록 홈스 ‘덕후’(마니아)이기도 해서 국내외에서 수집한 438권의 관련 도서를 소장하고 있는데, 덕분에 각별히 아끼는 역사적 인물 1위로 (‘셜로키언’들은 두 사람이 실존인물이라 생각하므로) ‘셜록 홈스와 왓슨 박사’를, 2위는 그들의 사회적 아버지 아서 코넌 도일을 꼽았다. 그토록 역사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도 셜록 홈스의 말을 인용했는데, “(우리) 삶은 인간 정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기이하다”는 것이다.

“실제가 허구보다 더 기이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역사가 픽션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적어도 픽션만큼 재미있죠. 역사책 읽기는 아주 간편한 시간 여행입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구체적인 사건을 다룬 미시사를 좋아해요. 자료가 부족한 부분은 상상력을 보태어 당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최파일 번역가는 16세기 이탈리아 농부 메노키오의 이단재판을 다룬 <치즈와 구더기>(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를 좋아한다. “메노키오라는 사람이 이단으로 선고받고 화형당했다는 걸 21세기 한국 독자가 알아봐야 별 쓸모가 없잖아요. 역사는 그처럼 딱히 쓸모가 없어서 너무나 매력적이에요, 영락없는 덕후죠?(웃음)”

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아마존>(존 헤밍, 미지북스, 2013)

유럽인이 아마존에 도착한 뒤 500년간의 역사를 다뤘다. 영국 왕립지리학회를 20년간 이끈 저자가 장기간 아마존을 탐사하면서 역사적 사건과 변화뿐 아니라 아마존의 생태, 지리, 원주민의 생활상 등을 촘촘히 기록했다.

<대포 범선 제국>(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미지북스, 2010)

대항해시대는 ‘바람’을 이용한 항해술과 대포 덕분에 가능했다. 1960년대에 쓰여진 이 책을 옮기며 최파일 번역가는 ‘역덕’들만 알아볼 책이라고 여겼으나, 뜻밖에 ‘밀덕’(전쟁·무기 마니아)과 ‘게임(대항해시대) 덕후’들이 가세해 “4쇄를 찍었다”고.

<근대 세계의 창조>(로이 포터, 교유서가, 2020)

18세기 영국 계몽주의 형성 과정을 다뤘다. “당대의 사상가들을 재미없게 계보식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신문기사나 기고문, 행사 팸플릿 등을 인용해 계몽주의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스며들어 확산됐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나폴레옹 세계사>(알렉산더 미카베리즈, 책과함께, 2022)

1803년 나폴레옹 전쟁이 나폴레옹 개인의 야망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여러 정치세력 간 이해관계 속에서 발생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조명했다. “한 권만 읽으면 나폴레옹 전쟁에 입문해 하산까지 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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