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친절한 이창용'의 함정
“우와, 예전 총재들보다 30분 일찍 끝났어요.”
지난 5월 26일 한국은행의 한 간부가 브리핑룸에서 감탄했다. 이날 한은은 기준금리를 연 1.5%에서 1.75%로 올렸다. 이창용 총재는 취임 후 처음 주재한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를 바꾼 최초의 한은 총재라는 기록을 썼다. 첫 등판에서 금리에 변화를 줬으니 설명이 길어질 법했지만, 간담회는 쾌속으로 마무리됐다. 국민에게 전달된 이 총재의 메시지가 명쾌했기 때문에 늘어질 이유가 없었다. 한은 관계자는 “예전 총재들한테는 ‘방금 그 말은 이런 뜻이냐’는 확인용 질문이 쏟아졌지만 이제 그런 ‘꼬리 물기’가 줄었다”고 했다.
이 총재는 시장과의 소통을 중시한다. ‘친절한 총재’로서 면모를 보이고 싶어하고 반응도 호의적이다. 그는 선명한 ‘포워드 가이던스(사전 안내)’를 해왔다. 지난 7월 사상 첫 ‘빅 스텝(0.5%포인트 인상)’ 이후 이 총재는 “경제 상황 전망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0.25%포인트씩 (금리를) 인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해왔다. 예측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이런 가이드라인이 왠지 불안하다는 지적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이 금리를 급격히 올리는 와중에도 한은이 ‘베이비 스텝(금리 0.25%포인트 인상)’만 밟겠다는 방침을 굳혔다는 인상을 풍긴다는 것이다. 일부 경제학 교수는 “‘한국은 금리를 많이 올리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해외에 보내게 된 꼴”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해 고금리를 견디기 힘든 나라라는 인식을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원화 가치가 급락하고 있지만 방어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이미지도 강해졌다.
지금은 한두 달 전과 비교해서도 미국이 훨씬 더 금리를 많이 올릴 것이라는 예상이 많아졌다. 대응 차원에서 캐나다·스웨덴은 한 번에 1%포인트를 올리기도 했다. 미국의 3연속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인상)’ 파도를 넘으려면 한은도 ‘빅 스텝’을 추가로 밟아야 한다는 주문이 많아지고 있다. 한은이 이런 요청을 수용하게 되면 이 총재는 말을 바꿨다는 비판을 들어야 할 수 있다. 그는 뒤늦게 “0.25%포인트 인상의 전제 조건이 바뀌었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그동안 그의 메시지에서 방점은 ‘0.25%포인트씩’에 찍혀 있었다.
요즘 각국 중앙은행은 풍랑이 몰아치는 가운데 안개까지 자욱한 구간을 지나는 선박과 같은 처지다. 앞이 안 보이는 시절이라 통화정책은 방향성만 제시해서 변화의 여지를 확보하는 게 낫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금리 인상 폭에 대해 먼저 숫자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요즘 세계 각국은 인플레이션을 누르고 통화가치를 방어하려는 ‘경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중앙은행 수장은 메시지를 전달할 때 신중하고 치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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