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죽은 여왕이 가르쳐준 것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2022. 9.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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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다시는 못 볼 대단한 규모의 장례식을 TV로 지켜보며, 여왕은 죽어서도 열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전대미문의 애도 행렬을 통해 영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전 세계 200여 나라 지도자들을 런던으로 불러모았다. 40억 명이 시청한 장례 미사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여왕을 ‘살아서는 봉사, 죽어서는 희망(Service in life, Hope in death)’의 상징으로 칭송했다. 누구보다 많은 이의 사랑과 작별 인사를 받고 영면한 엘리자베스 2세는 비록 먼 나라 여왕이지만 과거 영국과 오늘날의 세계를 어떤 세계사 교과서보다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영국인이 그렇게 줄서기 달인인 줄 이전에는 몰랐다. 7.5㎞까지 늘어선 줄은 시간당 0.5마일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줄 선 사람에게 목을 축일 수 있는 급수대와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가져올 것과 가져오면 안 되는 물건의 목록도 사전에 공지되었다고 한다. 런던으로 모여든 사람은 줄잡아 75만명 정도. 직장인은 휴가를 내고, 학생들은 결석계를 내고 그 줄에 합류했다. 그들은 영국인의 특기인 ‘잡담(small talk)’을 하며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낼 줄도 안다. 기온이 떨어져도 불평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은 일찍이 이런 영국인의 성향을 ‘줄서기 참을성(queue-tolerant)’이라고 불렀다.

9월의 런던이 그렇게 쾌청하고, 단풍이 들락 말락 한 공원과 가로수가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지도 알게 되었다. 호두까기 인형에서 본듯한 장난감 병정 같은 말쑥한 병사들이 유니언 잭으로 장식된 거리를 배경으로 장중한 음악과 플롯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장엄한 장례 행렬을 완성했다. 이를 본 CNN의 아만포어 기자는 “전 국민이 배우로 출연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여왕의 장례식은 1960년대 초에 이미 모든 계획이 수립되었고, 매년 두세 차례씩 실제 점검을 했다고 한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여왕의 장례식도 수십년의 준비 기간을 거쳤다.

유럽의 여러 왕조가 쇠락을 거듭할 때 영국의 왕실은 건재했던 비결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영국의 입헌군주는 자신의 존재 기반이 ‘국민의 사랑’임을 알고 일찍부터 그들과 소통하며 근대화와 민주주의에 적응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미디어를 매우 적절하고 탁월하게 이용했다. 1969년에 왕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국민에게 친숙하게 다가갔고,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메시지로 국민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번 장례식 역시 왕실 최초로 생중계를 결정해 전 세계의 이목을 모으고 왕실의 위엄을 과시했다.

몇십년도 안 되는 현대사를 두고도 국민적 합의가 어려운 우리에 비해 이번 장례식이 보여준 국가의 영속성과 안정감은 경이에 가깝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고, 결혼하고, 장례식을 치른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역사를 700년 동안 지켜본 곳이다. 57년 전 처칠 수상 서거 후 처음 열리는 이번 국장은 국가의 정점이 무엇이며 수호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웅변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두 손주며느리는 여왕이 물려준 귀고리를 착용했고, 증손녀 샬럿 공주도 증조할머니에게 받은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장에서 성가대는 그동안 왕실의 대관식과 결혼식 때 부른 노래의 악보를 다시 꺼내 목청껏 부른다.

아무리 여왕이라도 이렇게 전 세계가 애도하는 것은 여왕이 뭔가 잘했기 때문이다. 역사 평론가들은 그 이유를 여왕이 정치보다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정치적으로 어느 한편에 서지 않고, 영국의 정신적 지주로 봉사하는 데 중심을 두었기에 전 세계 나라들이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적통은 과거에서 나온다는 믿음으로 입헌군주의 힘과 위엄을 정치가 아닌 국격에 쏟은 결과다. 역사가 켜켜이 쌓인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치 죽은 자와 산 자가 피아노의 검은 건반과 흰 건반처럼 서로 어우러져 연주하는 웅장한 교향악을 듣는 느낌이었다.

죽은 자와 산 자를 극명하게 대비시킨 명연설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빼놓을 수 없다. 남북전쟁 당시 전몰 용사가 묻힌 게티즈버그 묘지에서 링컨은 전사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유의 씨앗을 소중하게 키워나갈 것을, 그리고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국가의 영속성이란 이렇게 죽은 자의 희생 위에 산 자의 헌신이 보태져야 가능한 것이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과거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나라를 세우거나 부수는데 죽은 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없던 사실도 만들어내고, 있던 사실도 부정한다. 역사 교과서를 맘대로 기술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손바닥 뒤집듯 바꾼다. 과거가 불리하면 왜곡하고, 과거가 이득이 된다면 부모도 바꿔치기할 사람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의 효용가치를 아는 그들이니 문화전선에서 빼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하다.

현실론자들은 이미 흘러간 과거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지 모른다. 오히려 미래가 더 중요하지 않으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죽은 위인을 산 자들이 부활시키지 않는 한 국가의 영속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비루한 산 자들만 우글거리고, 그들끼리 싸우고 헐뜯는 모습에 신물이 난 참에, 먼 땅에서 거행된 오랜 왕실의 장례식은 이런 역사의 지혜를 한 가닥 전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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