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돌고 나니] 얼마를 버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생각하니

이주연 2022. 9. 2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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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하늘은 천둥을 치며 비를 쏟아부었다. 곱디고운 황토밭을 할퀴어, 돌무더기 뼈를 드러내게 하였다. 하지만 이윽고 오늘 아침 하늘은 저 멀리 물러나 맑고 높푸르기만 하다. 더위 속에 웅성거리던 숲은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다. 얼마 전, 묵상 중에 있는 내게 한 형제가 불쑥 다가왔다. “목사님, 저 서울 다녀와야겠어요.” “왜?” “만나고 싶은 사람 좀 만나고, 조카도 보고 싶어서요. 고향에 돈도 보내려구요.”

나는 걱정이 앞섰다. 나갔다가 서울역 친구들과 술 한잔 하는 것이 열 잔 스무 잔이 되면 어떻게 하나? 하지만, 사람이 그립다 하고, 자활보조비를 모았다가 고향으로 보낸다 하니, 어떻게 안된다고 할 수 있겠나. 그러나 고향 보낼 돈 몇 백만원을 술 값으로 다 쓰면 어찌하나 걱정을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전에 수백만원으로 모두 술을 먹어 행려병자가 되기도 했던 전력이 있었으니.

나는 순간 결단했다. 믿자. 삶이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책임지고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몇 달간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기도하며 수도자적인 생활에 참여하며, 회개와 성찰의 시간을 함께 갖지 않았나. 그가 늘 새벽마다 제일 먼저 기도실에 오지 않았나. 믿자. 믿는 것만큼 믿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주께서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했다.

그런데 약속한 날에 돌아오지 않았다. 부정적인 상상이 불안하게 펼쳐졌다. 하지만 하루 늦어 돌아왔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놀랐다. 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온 것이다. 그는 수년간 머리를 등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지냈다. 몇 해 전,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랬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산발을 하고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마디도 그의 긴 머리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만의 개성은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했고, 공동체에 들어와서는 그 머리를 잘 빗고 멋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그 머리를 깎다니. 그의 깎은 머리를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놀라는 것이었다. 내가 농을 걸었다. “서울 다녀오더니 새마을 지도자가 되어서 왔네.” 그는 겸연쩍어 하며 “그냥 깎았어요.” 한다. 모범적인 아저씨가 되었다. 늘 그렇다. 노숙에서 벗어나면 옆집 아저씨고 삼촌이 된다. 그는 고향에 돈도 보내고 돌아왔다. 수입이 괜찮은 일자리를 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왜 돌아왔느냐 했다. 도시에서 하루 품삯은 많이 받아도 남는 것은 없고, 술 취하여 몸 버리는 것뿐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늘 이야기해 왔다. 얼마를 버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오늘 수입보다 한 해가 끝나는 날, 얼마나 남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날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삶이 끝난 이후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나의 욕망이나 세상풍조에 휘말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결국 남는 장사다. 내가 이 잔소리를 재방송하기 시작하니, 그가 웃으며 큰 소리로 막는다. “목사님, 이젠 나도 잘 알아요. 그러니까 왔지요.”

그후 어느 날 여유로운 시간에 한 마디 한다. “목사님, 정말 고마웠어요.” “뭘?” “지난번 교회 식구들이 와서 함께 찬양하던 날, 장로님들과 사모님이 나를 두 팔로 품어 주며 사랑한다고 하는데 정말 고마웠어요. 나 같은 노숙자를 같은 식구로 생각하고 안아주니까요.”

그런 연유 때문일까? 그는 이제 나를 걱정한다. 추석 연휴에 모두 고향으로 가고, 가지 못하는 한 형제가 공동체 남아 있었다. 그는 귀가 어둡고 혼자 밥해 먹고 지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밥 때문에 먼저 공동체로 와야 했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아내를 만난 그 형제가 이야기를 했단다. “우리야 어떻게든 먹고 지내지만, 목사님이 어떻게 공동체에 가서 지내는지 걱정이예요.”

이제 그 형제는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공동체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하고 차를 대접한다. 그는 사람들을 상대하기조차 피하던 날이 있었는데. 며칠 전, 전현직(?) 노숙인으로 꾸며진 우리 교회 찬양대와 서울나눔클라리넷 앙상블의 연주회로 중독치료센타 “빛이 임하는 집” 야외 자선음악회를 깊은 산중 평창 공동체에서 열었다. 우리 모두 3년간 한푼 두푼 모아 세우기로 한 것이다. 그가 이 음악회 준비에 제일 앞장섰다. 그는 알아서 여름내 허리까지 드세게 자란 풀들을 새벽부터 수백m 깎아냈다.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바쳐 중독치료센타 건립에도 보탰다. 뿐 아니라 농업을 통해 내일을 꿈꾸고 있다.

자선음악회에서 그는 고백했다. “공동체에 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술도 끊고, 적당한 노동도 하며, 몸도 좋아졌습니다.” 나는 그로 인하여 더욱 확신한다. 중독도 치료할 수 있다! 적어도 이 대자연 속에서 주의 사랑에 힘입어, 서로 믿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격려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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