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왜 문해력이 떨어질까 [매경데스크]

노원명 2022. 9. 23.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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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은 상대를 이해하는 힘
증오가 습관이 된 사회에서
문해력은 결코 자라지 않는다
1960년대 1인당 GDP가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했던 한국이 세계 10위권 국가가 되었다는 서사를 한국인들은 좋아한다. 그럴만하다. '한강의 기적'은 어떤 기준에서든 세계사적으로 희귀한 사례이고 60년 전 우리가 정말 가나보다 못살았는지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다만 60년 전 한국과 가나가 모든 점에서 동일한 출발선상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착각이다.

그때 아프리카 국가들과 한국 사이에는 1인당 GDP를 빼놓고는 비슷한 것이 별로 없었다. 한 국가가 발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경제학자들은 학교(교육), 은행(금융), 철도(교통), 관세(정책) 등을 꼽는다. 60년대 아프리카에는 이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갖춘 나라가 없었다. 한국은 상당한 수준의 제도적 인프라가 그때 이미 있었다. 대만도 그랬다. 한국과 대만의 공통점은 장기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근대 국가 시스템을 이식받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이런 말을 하면 '식민지 근대화론'이니 '친일'이니 하는 딱지가 붙으면서 이성적인 대화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일제 때 근대화 혁명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식민 지배를 긍정하는 것은 다르다. 근대는 서구의 작품이고 일본은 서구에서 배운 근대를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한국과 대만에 주입했을 뿐이다. 그때 배운 밑천으로 100년이 못 돼 일본 추월을 넘보게 된 것은 우리의 운이고 실력이다. 나는 제국주의가 유감스럽지만 식민 기간이 비교적 빨리 종식된 것과 그 기간 우리가 고통받은 것 못지않게 배운 것도 많았다는 행운에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모든 피식민국들이 뭔가 배울 수 있었던 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전 분야가 똑같이 발전하지는 않는다. 한국은 교육으로 일어선 나라지만 역설적으로 문해력에 문제가 있다. 문화평론가 정지우 씨는 이달 17일자 본지에 게재한 칼럼 '문해력 논란,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문제의 본질은 어휘력이 아니라 '이해력'이라고 갈파했다. 문해력은 상대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인데 팬덤과 확증편향에 갇힌 한국인들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요지다. 그 지적에 공감한다.

이달 11일 '우리에게도 '여왕'이 있었으면'이라는 인터넷 칼럼을 올렸더니 '우리에겐 필요 없다 언제 적 왕과 여왕인가 ㅋ'가 순공감 1위 댓글로 달렸다.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처럼 국민을 통합시키는 인물 부재를 아쉬워하는 글이었는데 '왕정주의자'로 공격당한 것이다. 댓글을 단 사람이나 '좋아요'를 누른 사람은 제목만 보았거나 무슨 뜻인지 알고도 그저 조롱하고 싶었거나 했을 것이다. 기자 생활을 해오면서 그런 일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확실히 한국인의 성정은 논리와 이성보다는 분노와 극단에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 논박하기보다는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이 한국의 공론장이다. 그 뿌리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지 잘 모르겠지만 식민 경험이 일조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있다. 건국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국민 이데올로기'는 '반일주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종교와 같아서 믿느냐, 배교냐의 선택이 있을 뿐 중간지대가 없다. 도덕적 분노 없이 일본을 논한다는 것은 불신자가 과학으로 신에게 접근하는 것과 같다. 안전한 다수에 속하려면 화내고 욕해야 한다.

건국 이래 한국 정치의 대립 전선 역시 반일을 중심으로 형성돼왔다. 한쪽에서 상대편을 '친일'로 공격하고 상대는 '친북'으로 맞받아치는 구도다. '악'인 상대와 싸워 이길 수 있다면 뭘 해도 괜찮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사람이 리더가 되고, 여당할 때와 야당할 때 말이 뒤바뀌어도 표정 하나 안 바뀐다.

이런 문화에선 문해력이 성장할 수 없다. 이 정도 문해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도 기적이다. 역사상 일류 반열에 올랐던 국가 중에서 증오를 민족 이데올로기 삼고 상대방 이해와 담쌓은 나라가 있었던가. 한국이 일류국가가 되려면 문해력이 신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맹목적 증오 습성을 고쳐야 한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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